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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레이은베르흐의 예를 다시 취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무의 열매에 대한 금지의 요체는 단지 그 열매의 섭취가 가져오게 될 치명적인 귀결에 대한, 신이 아담에게 준 계시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연의 빛에 의해 독이 죽음을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편지19). 다시 말하면 신은 아무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신은, 그 열매는, 그 구성 때문에 아담의 신체를 해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아담에게 인식시킨다. 열매는 비소처럼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출발점에서 스피노자의 핵심적인 논제를 발견하게 된다. 나쁜 것은 중독, 소화불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제가 그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개별적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배척이나 알레르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이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신이 삼가는 것은, 그것이 악덕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당신의 단일한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음식물을 자신의 본성이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삼가는 것처럼, 당신은 악덕을 삼갑니다.>
(스피노자의 철학 p51)

2.

신이 아무 것도 금지하지 않는 이유. 세상에는 오직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차이에는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고 다만 다를 뿐이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차이의 선택에 있어 나에게 좋은 것, 나쁜 것이 있을 수 있다. 알레르기나 나쁜 과보 같은. 음식을 삼가는 것처럼 악덕을 삼간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계를 지킨다. 그런데 계를 지키는 것은 좋은 것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니 경우에 따라 계를 어기기도 한다. 이때 역시 선택의 문제다.[결과에 책임지는(과보를 달게 받는)]
불립문자. 문자를 세우지 않는 이유, 진리를 내세우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3.

나는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이건 사랑을 장려할 의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말로, 사랑이 없다면 사회현상들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함으로 366)

4.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깨달음에서의 변화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식으로건 강제에 의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개인의 통찰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비록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단순한 생각이 불가피하게 폭정의 유혹에 직면케 한다 할지라도 내가 분명 다른 종류의 세계를 원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나는 서로를 존중하는 협력적 개인들이 구성하는 민주적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계를 갈망합니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더불어 살기'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압력과 폭력 없이 실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민주주의를 살아 있도록 유지하기 위해 민주적으로 고무된 개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여행이 곧 목적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용 가능한 수단은 내가 도달하고자 원하는 목적의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누구에게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입니다. (함으로 80)
 
5.

스피노자는, 타인들이 그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단지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일깨우고, 보게 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제3의 눈으로서의 증명은 요구하거나 심지어는 설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영감을 얻은 이 자유로운 전망을 위해 안경을 만들거나 안경 렌즈를 세공하려 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철학 27)

6.

마뚜라나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일 수 있을까요? 자유의 황홀한 이점들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슬에 묶어야만 할까요? 폭력을 거부하라고 우리가 사람들을 강제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접근법은 결코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내 견해는 이렇습니다. 소위 윤리적 법률과 규범들조차도 성찰의 가능성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의 토대들을 제거하고 복종을 요구합니다.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폭정을 위한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어떤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이 선택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믿음과 행위들에 내재해 있는 결과들을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강제하거나, 사물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다소 폭력적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7.

붓다의 가르침은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저렇게 살면 안 된다 하는 식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고, 저렇게 하면 저런 결과가 난다.'는 걸 알게 해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과를 원하면 이런 행동을 해야 하고,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으면 이런행동은 하지 말야야 함을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이것이 인연과보의 원리입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내가 이러저러한 인연을 지었기 때문에 나타난 과보(결과)입니다. 따라서 이미 나타난 결과를 놓고 억울해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내가 이미 지은 인연의 결과임을 알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르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 고이런 결과가 싫다면,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결과를 만드는 인연은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 원리를 알게 되면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연법을 알고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 p24>

8.

부처님께서는 어느 것이 옳다든지 혹은 그르다든지 하여 옳고 그름을 판정하기보다는 늘 스스로 알아서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논하지도 않았고, 상대의 주장을 반대하거나 부정하거나 혹은 비난하거나 배척하지도 않으셨지요. 그저 가미니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의 주장대로 강가 강에서 목욕을 한다면 모든 죄업이 소멸되고 하늘나라에 난다면 그 강물에서 태어나 자란 물고기가 누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가지 앟겠느냐 하고 모순을 지적해 줌으로써 질문한 사람 스스로 '그들의 주장에는 모순이 있구나!'라고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죠. 부처님이 그럿은 틀렸다고 답을 정해 줘서 상대방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게 아닙니다. (붓다, 나를 흔들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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