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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쨌든 그것은 나의 삶을 변형시킨 체험이었습니다. 이 변형과 의식 확장의 요소는 나의 체험에 (어릴 때에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아서 두 해석들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정신적인, 신비적인 차원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나는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었고 내 자신을 그것들과 부당하게 동일시했던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죽음과 마주침으로써 나는 내가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더 성찰적이게 되었고 덜 교조적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모든 세속적인 유대를 초월하는 영광스런 존재'로 서술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은 너무 강렬했고 그래서 나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순간적임을, 오직 변이일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옹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함으로 181)
2.
태어나고 죽는 건 단지 저 바다에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과 같고,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하나의 파도를 보면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바다 전체를 보면 파도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출렁거릴 뿐입니다. 그래서 생도 없고 멸도 없다, 생멸이 본래 없다, 불생불멸이다. 다만 변화만 있을 뿐이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웃는 집 39)
3.
여러분들이 숨이 끓어져 몸이 흩어져서 사라지는 것이나 지금 하루하루 세포가 바뀌는 것이나 전체적으로 보면 다 똑같은 변화인 거예요. 지금 바뀌는 것은 소나무 잎이 피면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상태여서 남이 볼 때 늘 푸르게 있는 것 같이 느끼고, 몸이 한꺼번에 급속도로 해체되는 것은 가을에 낙엽이 한꺼번에 떨저지면서 나무가 죽어버린 것처럼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은 실재하는 게 아닙니다. 실재하는 건 변화뿐인데, 보이면 살았다고 하고, 안 보이면 죽었다고 하고, 안 보이다 보이면 태어났다고 하는 거예요.
실재의 세계는 그냥 변화하는 거예요. 변화만 있지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기 행복전하기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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