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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몸에서 기를 통해서 전달된 파동에 관계성은 훨씬 우주적인데 이 파동을 읽어내는 사유체계는 굉장히 국지적이다. 우주 자체는 이렇게 국지적으로 어디를 뚝 떼어서 나룰 수가 없는데 사유라고하는 것은 국지적 사유, 부분적 사유를 하지 않으면 우리 언어체계로서는 사유해 낼 수가 없다. 사유의 특성 자체가 관계성이 아니고 비관계성, 독립적인 것처럼해야만 사유할 수 있는 특성이 나오게 된다. 물분자를 만들때 수소가 산소를 만났을 때는 해야할 사고는 산소와 만났을 때 정보적 분별만 해야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내 속의 염소와 만났을 때는 황산을 만들어 내는 정보도 있고, 혼자 있을 때는 다른 것을 내지 않는 정보도 있고, 다른 것을 만났으면 뭣도 있는데 만일 산소가 만났을 때 그 모든 것이 나오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정보들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물을 만들어 내는 국지적인 정보만 나온 것처럼 되는 것이다. 앎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반드시 국지적이 요소로써 작용하게 된다. 앎이 구성된 자체가 思量이라고 하는 말이 된다. 사량은 분별을 그 특성으로 삼아서 사량 그 자체로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게 그렇게 되야만 실재로는 이런 관계를 구성해내는데 그것이 거기에만 멈춰있으면 사량, 분별적 실체에 지나지 않는다. 의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특성이면서도 동시에 자기를 가두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에서 일어난 전오식에서 지각되어 진 것은 이 많은 여러가지 것들과 더불어 교류하고 있는데 그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특별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는 意를 통해서 걸러지고 국지적 요소로 변한다. 한편으로는 의가, 육식활동이 우리 삶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자기 특성에서만 갇혀혀져 있는 쪽으로 작용할때 우리가 중생이라 한다. H라고 하는 것이 물속에 들어 있을 때는 그것이 물인 것 처럼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H2O가 H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다른 것과 접하는 과정은 기억하지 않고 물로 있을 때는 그것이 물로만 기억되고 있는 상태와 똑같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사유를 하지 않는다고 보고있기 때문에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어서 스스로 자기를 사유할 수 있는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사유를 해보니 우리 몸을 변하지 않고도 우리가 물이 됐다가 황산도 됐다가 자기 분자도 됐다가 하는 이런 역할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좌선이든가 삼매체험을 통해서 이 몸을 버리지 않고도 우리가 이 몸으로도 존재하지고 하고 몸 아닌 것으로도 존재하고 또 의식만으로도 존재하기도 하고 하는 이런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욕계적 경험도 색계적 경험도 무색계적 경험도 할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의라고 하는 것이 몸을 띄고 있을 때는 이런 식의 활동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약간만 바꾸면 그런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되면서부터 反省知가 일어나서 깨달음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의라고 하는 것 속에 들어있는 많은 정보도 정보지만 눈이라든가 귀라든가 코라든가 지금보면 거대한 공간속에서 아주 작은 하나의 공간을 국지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몸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상태가 되면 열려서 비국지성으로 국지가 아니고 우주적으로 변화하는 체험들을 하는 것이다. 그런 체험들은 사유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사유가 끊어지는 곳에서 발생하게 된다." 1
- 정화스님 <유식강의>, 녹취록에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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