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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차별로써 높낮이를 정하고, 이웃 생명들과의 연대에서 권위로 작용하는 지식으로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지식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인연에서 함께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틀이 되어야 하며, 교조적 권위가 아니라 마음 쉼을 이끌어, 함께 살아가는 자리를 만드는 방편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늘 자신에게 깨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선의라도 다른 사람의 삶의 내용을 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은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여야 하며, 그 삶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인연을 열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여야 합니다. 선의라도 자칫하면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할 뿐 아니라, 그 힘든 일이 기억으로 남아 다음날의 삶까지를 어둡게 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잘 살펴보면 선의의 행동에서도 욕망의 집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이 그리는 세계에 대한 욕망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갖게 하며, 그것이 거부되거나 이해받지 못했을 때는 선의가 대부분 분노로 바뀝니다. 선의나 호의가 욕망을 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욕망을 선의로 포장하여 실천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하였는데 네가 그럴 수 있느냐."라고 분노하겠지요.
이것은 옳은 방편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옳은 것 같고 또한 이웃한테 칭찬받게 되는 행동이지만, 그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의 자기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욕심이며 욕망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한, 언제나 분노를 저 깊숙이 동반하고 있는 '포장된 선의'일 뿐입니다.
욕망을 남기지 않으며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가르침이 선지식禪智識의 가르침입니다. 망념이 작용하는 생멸문生滅門에서 진여문眞如門이 열리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욕망과 분노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마음 씀이 사라지고 나서야 바른 가르침 이 살아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실천이 욕망을 추구하지 않도록 잘 살피고,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추어 가면서, 자신의 힘에 맞게 조화로운 삶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 허망한 삶을 살지 않는 방편이며, 이웃과 평안함을 나누는 것입니다. 1
- <대승기신론2> p22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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