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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과 '집착을 떠나 있는 것'은 서로 상대하여 그렇게 개념 지은 것이지만, 삶의 신비는 개념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하는 그 마음에 고여 있는 시간의 기억이 기억인 줄 알 뿐만 아니라, 그 기억 속에 담고 있는 시비 등의 분별이 지금 여기의 삶에서 보니 허망한 것인 줄 알 때, 그 기억조차 현재를 새롭게 살게 하는 자양분이 됩니다.
기억과 추상이 집착으로 있을 때는 단지 집착된 허구였을 뿐이지만, 허구가 허구인 줄 알 때는 기억도 지금의 삶을 이루는 다양한 인연의 한 축이 되면서, 마음마음이 온 세계를 다 드러내는 신비로운 힘이 된다고 할 수 있지요. 그와 같은 마음으로 보면 우리네 일상의 하나하나는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집착으로도, 지혜로도, 있다는 것으로도, 없다는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미묘한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앎으로 피어나는 것이 그때 인연의 신비를 다 드러냅니다. 마음으로 그리지만 그림을 넘어서며, 갖가지 언설로 표현하지만 표현을 넘어서지요. 마음 하나하나가 생명의 신비이니 무엇만으로 그리거나 표현하는 것은 그 신비를 가두는 것입니다. 마음이라고 하여도 맞지 않지요. 그래서 마음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1
T:1000.0 : 기억하되 기억에 머물지 않는 마음은 기억에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기억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중도中道의 마음이다. 집착과 집착을 떠나 있는 것은 서로 상대하는 개념이여서 집착을 떠나 있는 것 또한 집착하는 것이다. 기억에 매이는 것이 집착이고 또한 기억에 매이지 않으려 하는 것도 집착이니 집착을 있는 그대로 집착으로 보는, 즉 실체가 없는 집착으로 볼 뿐으로 허망하게 본다면 기억에 빠지지 않고 기억을 건너는 것이 되어 현재를 현재로 살지 못하게 한 기억조차 현재를 새롭게 사는 디딤돌이 된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집착이 된다면 이또한 생각에 사로잡힌 집착이니 본래 버려야할 집착조차 없는 줄 바로 알아 집착하지도 않고 집착하지 않지도 않는 고요히 지켜보는 마음으로 주시해 시절인연따라 마음씀을 저절로 이루면 기억에 집착하지도 않고 기억에 집착하지 않은 것도 아닌 중도中道를 보게 된다. 이는 말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험해 보면 직접 실감하게 된다. 누군가의 쓴소리에 화가 나 받아쳐 한마디 했다면, 바로 화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이또한 화를 내지 않는 것에 집착한 것이 되어 화를 낸 것과 동일해진다. 이때는 가만히 참기보다 마땅히 해야할 행동을 즉각 해보면 현재를 새롭게 살게된다. 마땅히 해야할 행동은 저절로 알게된다. 중도中道는 현재에 깨어있을 때 저절로 일어나는 앎이다.
- <대승기신론2> p21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