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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신론에는 범부가 어제 한 일에 대해서 잘못을 알고 오늘 그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을 凡夫覺이라고 이름하면서 동시에 不覺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 覺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不覺이고 좋지 않은 의미에 있어서는 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이 근원적으로 我와 法이라고 하는 것을 허구로 세워놓고 그것에 따라서 만들어진 이미지에 맞춰서 흘러가게 두면 우리에게 좋은 삶이 오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가지가지 상의 전환은 우리에게 내재적으로 전재해서 변화가 오는 것인데 즉 피해의식 속에 識에 의해서 변한 바다. 피해의식 또 차능변무상. 能變이라는 것은 능동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근데 자각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요. 능동적으로 욕심내고 능동적으로 성을 내는 거다. 우리가 성을 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는데 왜 능동적으로 성을 내느냐? 이미 우리에게는 성낼 준비가 되어있다. 바람직하지 않는 상황이 오면 성냄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능동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또 바람직한 상황이 오면 성내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능동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려고 서있는 것이 意다.이 의에 이면속에 종자가 있다. 종자는 저 스스로 현행하는게 아니고, 이 종자를 현행시키기 위해서는 意에 기동력이 동원력이 필요하다. 의지라고도 할 수 있고, 그런 것이 발생해서 이 종자를 현행시키는데 이때 의에 의해서 현행시키는 것에 의해서 세워진 아와 법이 있는데 주로 우리는 나를 이롭게 한다는 생각으로 의가 종자를 동력시키는데 실재는 이롭지 않다. 욕심내는 것도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는 것이고 성내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는다. 유정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과 여기서 意가 이렇게 하면 내가 살 것처럼 생각해서 자기 속에 들어있는 심상을 끄집어 내는 것은 실재상황에서는 그렇게 해야 자기가 이롭다고 생각해서, 내가 욕심나는 쪽으로 작용해야 내가 이롭다고 생각하고, 성낼상황이 되면 성내는 쪽으로 작용해야 이롭다고 생각하는데 왜냐면 자각되지 않는 무명력에 의해서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우릭에게 끊임없는 허구에 삶을 살게 만드는데 그것은 다 識에 의해서 그렇게 보인다.[각주:1]

 

범부각은 불각이다, 즉 범부의 깨달음은 깨닫지 못한 것인데, 능동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의 기반이 意의 이면인 종자에 있기 때문이다. 종자는 의에 의해 현행하여 주체와 대상을 따로 세워 나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하지만 실재로는 이롭지 않다.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 성을 내는 것이나 욕심을 내는 것이 실재로는 이롭지 않는데도 그렇게 하는 것이 범부각이니 곧 불각인 것이다. 잘 알아서 행한다고 하지만 실재로는 모르고 있는 것. 나에게 이롭지 않은 것으로 나를 이롭게 할 수 없으니 욕심과 성냄이 무명에 기반한 것임을 알고 무명으로 부터 깨어있어야 한다. 분별심이 곧 무명.  

 

 

 

 

 

 

 

  1. 정화스님의 유식강의 공부중에 유념해 둘 의향으로 강의 내용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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