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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만일 무유정법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해도 이 앎을 알아 행하는 실천적 문제는 삶과 직결된다. 앎이 있더라도 그 처신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는 앎의 앎이 나에게는 더 어렵다. 하여 생각나는 사례들을 은미해보고자 한다.

1.

그렇지만 현재 통용되는 다양한 정의들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자인 노버트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는 생명체와 기계에 있어서 규제와 정보전달에 관한 학문이이라고 적고 있고 기업과 경영 컨설턴터인 스태포드 비어는 사이버네틱스를 조직의 학문으로 정의하며 신경철학자인 워런 맥컬럭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지식의 산출을 다루는 인식이론이라고 얘기합니다. 미국 사어버네틱스 학회의 선언에서는 '사이버네틱스는 사실들의 수집이 아니라 사유의 방식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고든 패스크는 좀 더 일반화해서 '그것은 예술 혹은 철학이고 삶의 방식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규정을 하려는 그러한 시도들 속에서 아주 멋진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먼저 저의 기쁨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것들은 접근방법의 다양성을 허용해주는 것입니다. 가능한 것의 폭과 느슨함이 멋진 자극이 됩니다. 여기서는 각자가 자신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어떤 입장이나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게 사이버네틱스의 매력입니다. 몇몇 사람들에게 하나의 정의를 요구하는데 사어버네틱스에 대해서 알게 되는 바는 별로 없고 대신 정의를 내리는 사람에 대해서, 그의 전공분야에 대해서, 그가 세상과 어떻게 관련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은유를 즐기는 모습에 대해서, 경영에 대한 그의 찬사에 대해서, 커뮤니케이션이론 혹은 정보이론에 대한 그의 관심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저의 친구들인 스테포드 비어, 워런 맥컬럭, 노버트 위너, 고든 패스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됩니다. 멋진 일이지요. (발명품 166)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는 체계의 특징들이 어떤 다른 방식으로 기술될까요? 자기조직화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시렵니까?

저는 정의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더 이상의 정의를 유보하고 대신 어쩌면 이 개념에 대한 좀 더 심도 있고 동적인 해석을 가져올 일련의 고찰과 아이디어에 관해 얘기해 볼 것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발명품 143)

2.

결정할 수 있는 질문이란 항상 올바른 답, 가능한 답을 이미 제시하는 어떤 틀 안에서 결정됩니다. 그런 질문의 결정가능성은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들여야하는 특정 게임규칙과 형식을 통해서 보장됩니다. 삼단논법, 문장론(문법), 산술법 등이 그런 형식의 예입니다. 우리는 논리수학적 연결망이라는 틀 속에서 하나으 ㅣ결절점(하나의 문제 혹은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다른 결절점(답 혹은 해법)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2546이라는 숫자가 2로 나누어지는가에 묻는 질문은 즉각 대답 가능합니다. 마지막 숫자가 짝수로 된 수는 2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결정할 수 없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건 고차원적 본질의 존재, 삶의 의미, 세계의 성립, 사후의 생 등을 다루는 물음입니다. 그런 질문은 있을 법한 수많은 답을 갖고 있습니다.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이게 어떻게 결정됩니까? 만약 물리학자에게 답을 구하면 쉽게 알게됩니다. 모두가 알듯이 백억 혹은 이백억년 전에 빅뱅(근원적 충돌)이 있었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우주가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충돌의 여음으로 여겨지는 미세한 소음을 거대한 초음파 안테나를 통해서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신앙이 깊은 카톨릭 신자에게 묻는다면 천지 창조의 매일 매일을 기술하는 자세한 창조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만약 인도의 힌두교도에게 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그는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어린애들도 알듯이, 한때 거북이 한마리가 있었는데 다른 거북이가 그 위에 올라앉았고 또 그 위에 다른 거북이가 올라갔는데 맨 위 거북이 위에 우주 속 우리가 앉아있다"라고 말이죠. 이 사람 저 사람, 투르크메너족에게, 에스키모에게 질문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서 어떻게 우주가 생겨났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옳은지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은 결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답은 답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뭔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요약하자면,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 제가 뭔가를 말하면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누가 저에게 거북이에 대해서 얘기하면 저는 '아! 저 사람은 힌두교도이구나'를 압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빅뱅에 대해서 얘기하면 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압니다. 아하! 넌 물리학자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발명품 252)

3.

하지만 어느 지점부터는 욕망은 이성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게 문제를 일으키지요. 난 가끔 백화점에 들르곤 합니다. 난 백화점 구경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물건들을 볼 때마다 내 안에 욕망이 싹트기 시작하고, 먼저 이런 충동이 생깁니다. '그래, 난 이것을 갖고 싶어, 저것도 필요해.' 그러고 나면 두 번째 생각이 떠오르면서 난 마음속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아, 정말로 이것이 내게 필요할까?' 그 대답은 언제나 '노'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첫번째 욕망을 따른다면, 다시말해 최초의 충동에 따른다면 얼마 안 가 당신의 주머니는 텅텅 비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음식, 옷, 집을 원하는 것은 그런 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욕망이며, 훨씬 더 합당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행복론 33)

4.

저의 바람은 내 말을 (나의 언어를) 잘 구사해서 정치가 됐건, 과학, 시 혹은 무엇이 됐건 모든 대화 속에 나의 윤리가 내재되도록 하는 것, 그래서 내가 어떤 문장을 말하더라도 늘 점잖은 사람으로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려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재판관이나 경찰과 같은 지위로 끌어 올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각자의 여지를 부여하는 그런 점잖은 사람 말입니다. 이게 제가 궁긍적으로 올바른 언어와 설명형식을 말하기 위한 어떠한 범주도 어떠한 목록표도 언급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발명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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