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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태도를 나는 괄호 친 객관성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의 감정적 기초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기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질문은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모든 시도가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길에 따르면 객체들과 존재의 체험 사이의 구분이 부정되지는 않지만 객체들에의 준거[기초]가 설명들의 기초는 아닙니다. 모든 설명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체험들 간의 정합성입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자면, 관찰자가 모든 실재들의 기원이 됩니다. 모든 실재들은 관찰자의 구분 작동들을 통해 창조됩니다. 우리는 구성적 존재론들의 영역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존재는 관찰자의 '함'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존재론 말입니다.[볼때는 봄만이 있다: 유식]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설명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가 결코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고 무수한 가능한 실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무유정법] 그러한 실재들 각각은 완전히 정당하며 타당합니다. 물론 바람직한 정도는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설명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변 인간들의 복종을 요구할 수 없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고 협력과 소통을 추구할 것이며,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 우리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간주하게 될 것인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주장은 만일 그것이 실재의 적절한 영역의 타당한 기준들을 충족시킨다면 참될 것입니다.[중도]  (함으로 66)

2.

무엇이 옳은 길인가? 그것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실제의 적절한 영역의 타당한 기준들을 충족시키는가에 달려있다.[무유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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