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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관찰자의 지각들이 그들의 구분들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 관찰자들이 구축한 세계는 도무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들 주변의 인간들은 모두 그들의 상상력이 지어낸 산물들에 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립된 정신을 가진 키메라들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인식론적 유아론에 해당하는 생각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유아론자들에 동의하나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단순한 이유를 들자면 나는 나 자신을 홀로 그리고 고립된 채로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당신과 함께 이 방에 앉아 둘이 서로에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 자신을 체험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종류의 체험이야말로 그것이 내 자신의 것이건 또는 다른 사람의 것이건, 나의 모든 진전된 성찰들과 설명들의 출발점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유아론적 입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나의 사고를 그런 범주에 넣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길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분명 선생님은 지금 혼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이 인터뷰의 체험이 선생님이 유아론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해주는 건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가 우리와 독립적인 어떤 것을 구분해 낼 수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음'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내가 볼 때 그 대답은 언어가 더불어 살기의 방식이자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가?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다.' 다음 질문은 이렇습니다. '누가 인간들인가?'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인간들이란 인간의 더불어 살아가기의 과정에서 구분되는, 그처럼 특별한 실체들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순환적인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나에게 인간은 존재적인 또는 존재론적인 실체, 즉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닙니다.(있음에서 함으로 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선생님이 선생님 주변의 인간을 주어진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지금 바로 여기 선생님의 탁자에 앉아 인터뷰하고 있는 나는 하나의 환각, 그러니까 선생님의 머릿속에 있는 하나의 단순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그럼 선생님은 결국 유아론자가 되는 게 아닌가요?

이것이 필연적인 결론은 아닙니다. 물론 당신이 하나의 환각이라는 결론에, 그리고 내가 단지 당신의 현전을 상상하고 추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 때문에 내가 반드시 유아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당신이 하나의 환각이라 해도 내가 불가피하게 유아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일상적인 삶을 나의 아내와 함께 보내기 때문입니다. 내 아내의 존재는 나에게는 전혀 어떤 환각의 상태를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아내와 나머지 세상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만일 우리가 우리 모두가 단순한 환각들이라고 믿는다면,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는 아무런 기초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체험을 환각으로 분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필요합니다. 즉 이 체험은 그것이 체험될 때 그와 동시에 환각적인 것으로 체험되지 않는 어떤 것과 관련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출발점은 나의 체험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그 모든 것을 어떤 시점에서 지각 가능한 사건들로 경험하고 구분한다는 것이다.' 나는 존재나 외부 실재의 속성들과 관계가 없을 뿐더러 유아론이나 그 밖의 다른 종류의 인식론을 방어하는 것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우리의 체험들을 낳고 형성하는 작동들을 이해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작동들을 설명하는 바로 그 행동 속에서 명확해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서술하는 대상들과 실체들로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유아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재론자도 분명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생님이 두 개의 인식론적 극단 사이의 중간 위치를 대표하는 구성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고전적인 유형의 구성주의는 외부, 심지어 절대적 실재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와 같은 실재의 내적이고 참된 형식을 결코 알 수는 없다고 가정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성물들이 실패하고 붕괴할 때가 되어서야 그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것들이 실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견해에도 역시 의견을 같이 하지 않습니다. 내가 구성한 것들과 실재 사이의 - 그 구성물들이 잘못된 것으로 입증된 - 그와 같은 충돌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누가 보여줄 수 있죠? 어떤 타당성이 이와 같은 가정 - '그것이 어떻게 확증될 수 있는가'- 을 갖는 거죠? 내가 볼 때에는 하나의 가설이 붕괴되는 것은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는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컨대 나는 나 자신을 구성주의의 대표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사 내가 반복해서 계속 구성주의자라고 불린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럼 선생님은 스스로를 뭐라고 부를 건가요? 어떤 종류의 명칭이 선생님의 입장이 갖는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줄까요?

대답이 망설여지는데요. 왜냐하면 이러한 명칭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명칭이 붙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합한 명칭을 요청받을 때마다 나는 종종 내 자신을 -진지하게, 그러나 장난스럽게- "슈퍼 실재론자"라고 부릅니다. 무수한 동등하게 타당한 실재들의 존재를 믿는 '슈퍼 실재론자'라고 말입니다. 더욱이 모든 상이한 실재들은 상대적인 실재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절대적 실재를 그것들의 상대성을 측정하게 될 준거점으로 가정하는 것을 함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있음에서 함으로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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