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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뚜라나 내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행위 순환[재귀]적인 조정, 즉 행위의 조정의 조정에서의 흐름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것, 즉 언어가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어가 출현할 때 대상들이 출현합니다. 예컨대 택시 같은 것 말입니다. 택시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행위의 두 번째의 조정(첫 번째 순환[재귀])에 의해 조정을 이룬 행위의 조정으로서의 승객을 태우는 수송 및 운전은 행위의 세 번째 조정(두 번째 순환[재귀]) 속에서 택시라고 "이름 붙여져"나타나는 행위의 그러한 배치가 된다.' 이것은 (택시가 수송[실어나름]을 모호하게 하는 것처럼) 대상들이 자기들이 조정하는 행위를 모호하게 하는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으로서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푀르로젠 선생님이 제시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이 새로운 이해가 갖는 장점은 무엇입니까?

 

마뚜라나 이것은 언어가 정보 전송의 수단이 아니라, 그리고 소통 체계가 아니라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의 흐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임을 드러내 줍니다. 이것은 상호작용하는 체계들의 구조적 결정론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일단 이것이 파악되고 나면 상징들이 언어의 시초가 아니라, 역으로 언어가 상징들의 기원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잠깐 우리가 체계들의 상호작용 및 언어현상과 관련한 우리 대화의 앞머리에서 논의했던 인터뷰 약속이라는 핵심적인 사례로 돌아가 볼까요? 당신이 칠레로 오기 전에 우리가 나눴던 전화 통화는 함부르크에서 산티아고로, 또는 산티아고에서 함부르크로 이어지는 정보 전송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상호작용의 결과는 두개의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 푀르크젠과 마뚜라나-이 그들의 행위의 순환[재귀]적인 조정을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을 이루어 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여기에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언어는 행위의 조정들을 조정할 때 출현한다. 예컨대 택시가 반대차선에서 서있는 사람을 보고 클락션을 누르며 손짓을 한다. 반대편 사람은 택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고 손을 흔든다. 이에 택시는 가던 길을 한다. 이때 기사가 택시를 반대차선으로 돌릴 것인가는 행위의 조정을, 반대편 사람은 손을 흔들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행위의 조정의 조정이다. 언어가 출현하는 때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이 일어날 때다.(언어의 출현을 통해 택시는 가던 길을 갈 수 있다. 만일 언어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택시는 택시를 돌릴 수도 그냥 갈 수도 없어 망설이다가 자기 길을 갈 것이다.) 이 조정의 조정이 순환하면서 배치를 이루고 고정화될 때 언어의 대상이 출현한다. 다시말해 언어는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으로 출현해 그 조정들이 순환하면서 이룬 배치를 대상화한다. 그런데 언어가 대상화하는 것은 결과인데 우리는 대상을 시초로 착각한다.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출현[행위의 조정의 조정]과 순환과 배치가 대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언어 속에서 출현한다. 즉 세계가 있고 언어가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마뚜라나의 통찰처럼, "언어가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의 흐름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임"을 깨달은다면, 대상화/고정화시키는 언어를 뒤집어 유연하고 매끄러운 흐름으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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