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앎의 앎

자본주의와 인정욕망

T1000.0 2019. 12. 5. 20:29
1.

자본가들 또한 다르지 않다. 자본가는 물건을 만들 때, 자기가 좋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만들지 않는다.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이기에, 살 사람의 욕망을 겨냥해서 만든다. 즉 소비자의 인정을 받는 상품을 만들고자 욕망한다. 그들 자신의 말대로 그들은 '소비자에게 봉사하는 ' 노예다. 대학생[취준생]들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한 것이다. 즉 그것은 노예의 요구인 것이다. 한편에 노예가 있고, 다른 한편에 그 노예의 노예가 있다. 노예가 노예를 만들고, 노예가 노예를 부리는 체제, 그 이중의 노예의 체제가 자본주의다. 그 체재를 작동시키는 것이 인정욕망이다. (삶을 위한 철학 수업 228)

2.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라깡은 인정욕망이 인간이 갖는 욕망의 본질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작동시키는 것이 인정욕망이라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갖는 욕망의 본질과 맞물려 돌아간다. 

그렇다면 인정 욕망을 너머, 그 욕망을 통찰해 자기 욕망을 긍정할 때, 자본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들어내지 않을까? 


3.

이러한 질문과 연계해 스피노자가 <신학 정치론>에서 제기한 질문들과 이 책의 독창성에 주목하면,

"인민은 왜 그토록 비합리적인가?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자유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왜 그토록 어려운가? 왜 종교는 사랑과 기쁨을 내세우면서 전쟁, 편협, 악의, 증오, 슬픔, 양심의 가책 등을 불러일으키는가?"(스피노자의 철학 20)

"종교를 하나의 결과로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수 있다. 이때 결과는 인과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광학적 의미에서 말해지는 결과이다. 인간들 자신은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원인들에 그 결과를 다시 연결시키면서 그것의 생산 과정(예를 들면, 자연 법칙들이 강한 상상력과 나약한 지성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필연적으로 <기호들>로서 이해될 수밖에 없는가)을 추적해야 한다."(21)

예속과 전도몽상에 주목해 질문을 고쳐 다시 질문하면 인정 욕망이 (인간의 본질적 욕망이라는 점에서) 중생의 마음이라면 인정 욕망 너머에 부처의 마음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왜 필연적으로 중생의 마음을 갖게 되는가?
또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을까?   
또 부처가 되는 것뿐이 아니라 인정욕망의 작동체계인 자본주의를 해탈캐하는 모색은 가능한가? 그리고 어떻게?

'앎의 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중도 찾기]  (0) 2020.02.03
확실성의 위험성 : 선의  (0) 2019.12.15
괄호친 객관성의 다양성의 초대  (0) 2019.11.26
이름뿐  (0) 2019.11.20
추론해 보기2  (0) 2019.11.17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