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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변이란 말은 매순간 변화한다는 말인데 변화한다는 두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같은 것이 다른 상태로 된다는 뜻이 있고 하나는 매 순간 다른 것이 된다는 말이 있다. 識이라고 했을때 식이라고 하는 어떤 것이 계속 전에도 있었고 그 식이 변해서 다른 식이 된다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매순간 앎이라고 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일어나고 있는 것 자체가 총체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전찰라와 후찰라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데 그 다른 것이 안다라고 하는 사실로 나타난다. 변화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생각에 어린이가 어른까지 되어가는데 그 어떤 것은 있으면서 점점 변해서 어른이 되간다고 하는 식의 변화가 아니고, 아예 통체로 어린이와 어른과는 다른 상태가 되가는 것이다. 그래서 唯識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다름이 앎이라고 나타난다고 하는 말이다. 식이 있어서 점점 그것이 무슨 인연처에서 다른 변화를 이해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전후찰라와 후찰라가 완벽히 다른 것이 그 다른 것이 앎이라고 하는 사실로 나타난다. 아는 주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다만 다름이 앎으로 나타난다.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차별을, 분별을 의미한다. 전후찰라가 다른 걸보면 원성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매순간마다마다 완벽하니 자기자체를 지우는 것으로 있는 것이다. 단 한 순간도 완벽하니 깨달은 사람은 전에 경험된 것을 가지고 지금가지 오는 게 아니고 전후찰라가 완벽하니 다른 한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있어서 전후찰라를 계속 가거나 법이 있어서 전후찰라를 가면서 인연따라 변한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말한 識의 전변이란 의미가 아니다. 전찰라와 후찰라가 완벽히 다른데 이 다름이 앎으로 나타나지만 인연의 유사성에 의해서 그 다름에 차가 적기 때문에 마치 그 가운데 같은 것이 많은 것처럼 보안다. 다만 죽음이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그것이 완벽하니 다름의 증거해주기 때문에 그 상태를 異熟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재 매순간 우리에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숙이다. 이숙이라고 하는 말은 이숙식이 있어서 달라간다는게 아니고 전후찰라가 완벽한 다른 존재를 구성해 내면서 앎이라고 하는 사태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라고 하는 것이 전후찰라에 매순간 완벽하게 다른 것으로 존재한다고 이름붙여지면 어떤 한 찰라도 이것이 허망하지 않다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 이 허망은 동시에 한찰라도 자기자체를 분별된 상태로 남겨놓지 않는다. 분별이 됐지만 다음 찰라에 보면 이 분별 된 것이 전 찰라에 분별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자기가 드러나기 때문에 분별된 그 상태로 무분별을 완벽하니 살고 있는 것이 허망분별이다." 1
- 정화스님 <유식강의> 녹취록에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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