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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모든 지식이 필연적으로 '관찰자에 의존하고', 궁극적 실재를 주장하는 것은 테러로 이어지며, 어떠한 형태의 강압도 거부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 오고 있는 모든 생각들이 매우 넓은 의미에서 윤리적인 가정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인상이 드는데요. 우리는 실재적인 것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과 관계된 결론들 및 귀결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오고 있습니다. 내 질문은 이제 선생님의 윤리적 요구들이 인식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영원히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추정을 위한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증명할 수 있나요?
당신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증명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참 또는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어떤 가설은 그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증명되는 걸까요? 단지, 이른바 증거와 내 자신의 전제들 사이의 이러한 상응 때문에 증명의 방법에 귀 기울이고 빋을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을 그것이 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이라 부르는 걸까요?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옳거나 틀릴 수 있을까요? 무엇이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걸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즉 나는 (내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 진술할 수 있는 과학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과학적 설명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논증들과 추론들을 제공할 수 있지만, 내가 실제로 말하는 있는 것은 참도 거짓도 아닙니다.
하나의 증명 또는 과학적 설명은 설득려 있는, 그리고 특히 절대적으로 타당한 형태의 증거가 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됩니다. 증명이 가정이나 가설을 진리로 변형시켜 준다는 것이지요.
나는 이것에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내가 볼 때, 증명이란 서술을 납득할 만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증명하고 싶어 하는 사건을 발생시키고 생산합니다. 증명들과 설명들은 외부적 실재나 진리의 성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어떤 논증이나 설명을 그것들이 타당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우리가 - 어떤 이유에서건, 그리고 타당성의 가장 다양한 기준들을 기초로 해서 - 받아들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믿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체험은 사실상 일종의 조화의 체험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문제들이 마침내 해결된 것처럼 보이고 대답들이 찾아진 것처럼 보일 때, 그 때 모든 의심과 연구는 만족함의 상태로 대체됩니다. 더 이상의 질문들은 없습니다. 증명들과 설명들은 근본적으로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그것들을 수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들은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받아 들인다면, '증명되고 설명되어야 할 것'의 수용가능성에 대하여 결정하기 위해서 타당화의 기준을 우리가 의식적으로건 또는 반의식적으로건 항상 적용하는 것입니다. (함으로 86)
2.
결국은 모두 심리적 위안의 문제입니다. 스님이라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그 결정에 위안이 좀 되는 겁니다. 저울대가 왔다갔다할 때 스님이 한쪽을 살짝 눌려주면 그렇게 기울어집니다. 그런데 확연히 반대쪽 무게가 무거우면 스님이 이쪽을 아무리 눌러도 절대로 따라오지 않아요. 그래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 거에요. 제가 해 보니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법문 듣고 좋아졌다고 해도 제 덕이 아니라 모두 자기 근기, 자기 복입니다. 제 말을 듣고 따라서 변한 것이 아닙니다. 고만고만한 경지에서 간당간당 흔들릴 때 살짝 거들어준 것 뿐이에요. 아예 얼토당토않은 상태라면 제가 아무리 깨우쳐주려 해도 못 깨칩니다. 자기 생각에 꽉 사로잡혀 있으면 관세음보살 진신과 3년을 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깨우쳐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깨어있기 102)
3.
제가 법문을 하면 신도님들이 들으면서 고개들을 끄덕끄덕해요. "아이고, 스님 말이 옳소." 이렇게 말하면 제 말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이고, 고개를 저으면서 "에이, 아니에요." 하고 반응하면 제 말을 거부하고 듣지 않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이는 것은 제 의견이 자기 생각과 같다는 뜻이고 좌우로 흔드는 것은 제 의견이 자기 생각과는 다르다는 뜻이지요. 제 법문이 옳아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같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님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저 스님이 좀 보게, 내 생각과 다르네. 저렇게 생각하면 안돼는데.' 이런 뜻입니다.
4.
저는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동의해줘도 속지 않고 동의해 주지 않아도 거기에 속지 않습니다. 스님 훌륭하다고 칭찬해도 속지 않고, 막 욕해도 거기에 속지 않습니다. 속으면 저만 손해거든요.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소리에 속아서 붕 떴다가 거품이 빠지고 나면 땅에 떨어져서 허리 부러지는 거예요. 비난한다고 거기에 속아서 밤새 잠도 못자고 괴로워하면 그것도 저만 손해지요. 각자 다 자기 식으로 생각하며 사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지금 여기 깨어있기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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