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회통(횡단)학

진정한 자유와 주인

T1000.0 2012. 4. 18. 20:19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삶, 또는 자유를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자유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가능한 선택들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그 가능의 수들, 선택 가능한 여지가 곧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삶, 또는 자유는 그 조건인 시간과 공간이 조화를 이루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되야 한다. 만일 나의 자유가 시간과 공간의 불일치를 초래하는 행위를 선택하고, 거듭 주장한다면 그것은 분명 삶을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때문에 자유가 삶과 동행하는 것이라면 진정한 자유는 시공간과의 조화만을 요구한다. 그외 가능의 수들, 즉 선택 가능한 잘못된 불일치들의 수는 삶에 역행하는 자유를 의미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은 타당하다. 진정한 자유는 삶과 동행하는 자유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흔히 말하고 사용하는 선택의 자유를 자유라고 한다면 그 말은 틀린 말이다. 굳이 죽음을 택할 이유가 없다. 삶과 동행하는 진정한 자유외에 다른 것을 선택하는 자유들은 조화와 얼마나 상반되는냐 또는 멀어지느냐에 따라 여러 과보를 받게 된다. 단 이때 과보를 받을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삶이 파멸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며 바람직하다. 과보는 불일치의 결과로서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 몰라서 조화를 등지는 자유를  선택하였고 그에 따른 과보가 발생했는데 이런 이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탓을하며 회피하려고만 한다면 괴로움이 생긴다. 하지만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반성하고 성찰해 병을 고치는 계기로 삼는다면 결국에는 이롭다. 삶은 살아보지 않고서는 모르기 때문에 조화를 알아가는 불일치 과정에서 마음이 괴롭고 몸이 아플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조화를 등지는 줄 알고도 선택하여 그 과보를 받아들인다면 삶을 크게 해손하지 않는 선에서는 해가 없다. 그 정도면 그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판단이 서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과 동행하는 자유인으로서 그같은 선택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시공과의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행위를 하려는 데 애써야한다. 그래야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다.

 

아래에는 자유에 관한 많은 이해와 도움을 준 마뚜라나의 말을 인용해 놓는다.  

 

인간 영역에서 자율은 한 사람의 독특하게 특징적인 어떤 것이 보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는 무언가 다른 것, 즉 성찰을 필요로 하는 인간 체험입니다. 엄밀히 말해, 결코 자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 모든 사고와 모든 행동은 그 순간의 구조적 정합성들과의 일치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에 대안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구조적 정합성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안적인 행동 방식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차로에 도달하게 되면 그들은 두 방향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여행을 계속하기 위한 두 개의 선택지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더 좋은 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우선 차이를 만들어서, 선택할 수 있기 위하여 두 방향들을 구분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쩌면 그들은 동전을 뒤집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그 순간에 주어진 구조적 정합성들과 일치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해 줄 차이를 드러내 주는 과정들을 위해 길을 나아갈 것입니다.(『있음에서 함으로』p121 )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