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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 부처님은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뛰어난 비구 1250명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를 입으시고 직접 바리때를 드시고 사위성에 들어가 걸식하실 적에 그 성안에서 차례대로 걸식을 마쳤다. 다시 본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와 공양을 하신 뒤 가사와 바리때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은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1, 법회인유분」[각주:1]    

 

『금강경』이 선사하는 가슴벅찬 감동은 말하는 것-이 역시 보석같은 감동이지만-보다 말하지 않는 것에 있다. 『금강경』의 등장인물 수보리가 부처님께 감복하는 이유도 말하지 않는 것에 의한 감동이었다. 어디 수보리 뿐일까! 『금강경』을 읽다보면 문득, 조금 뒤늦게, 수보리처럼 감복하는 순간이 온다. 내[이미 여러사람의]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금강경』에 글자로 쓰여 있지 않는 감동이었다.

어느 날 수제자 수보리는 평소처럼 천명이 넘는 무리에 섞여 부처님을 따라 성내로 들어가 걸식을 하고 온다. 금강경 제 1. 법회인유분은 한 때 있었던 일, 즉 한 사실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덧붙여, 선명하게 그림 그려지는 이 1분의 모습은 매일매일의 일상이다. 그런데 이 일상을 늘 함께 해오던 수보리가 '불현듯' 무언가에 감복해 부처님께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오른쪽 어깨에 옷을 걷어 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으며 합장한 뒤 부처님께 공손히 아뢰었다. 

그리고 묻는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살펴 주시며 모든 보살에게 낱낱이 부촉해 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와 선여인이 최상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보리심을 낼진댄 마땅히 어디에 자기 마음을 머무르게 해야 하며 어떻게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감복한 수보리가 이렇게 부처님께 '항복받는 마음[항복기심降伏其心]'에 관해 묻는데, 수보리가 감복한 이유는 바로 '걷고 있는' 부처님의 생생한 모습이었다. 불현듯 수보리는 부처님이 날마다 한순간도 빠트리지 않고 "모든 보살을 하나도 빠지없이 보살펴 주시며 모든 보살에게 낱낱이 부촉해 주시는 것"을, 하루하루 부처님과 일상을 동행하는 체험을 통해 사무치게 깨달은 것이다. 바로 제1분에 묘사된 부처님의 일상에서 큰 감흥을 일으킨 것이다. 매일 일곱집을 들러 탁발을 하는데 부자와 가난한 집을 분별하지 않고 차례로 걸식[차제걸이次第乞已]을 하시는 부처님의 일상모습에서 크게 감동한 수보리는 부처님의 그 마음이 궁금해진 것이다. 부처님이 응답하신다.

"참으로 잘 말했고 참으로 잘 물었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바대로 여래는 모든 보살을 빠짐없이 보살피고 모든 보살에게 낱낱이 부촉해 준다. 그대를 위해 말할 테니 그대는 나의 말을 잘 들어라. 선남자와 선여인이 최상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보리심을 낼진댄 응당 마음을 이렇게 머무르게 해야 하고 이렇게 다스려야 한다."

제3분부터는 수보리의 즉문에 대한 소상한 즉설이 이어진다. 제3분[각주:2]을 요약하면 마음을 항복받는 보리심은 "첫째는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요, 둘째는 그런데 내가 구제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한 중생도 구제를 받은바가 없다는 것이요. 세번째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라는 말씀이다."(93)

그런데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금강경』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다. 『금강경』은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라는 '법문'과 그 마음을 내어 일상을 살아가는 부처님의 '모습'이 그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다. 금강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형문자를 이루고 있다. 상형문자란 그림과 말이 하나인 그려지는 바가 말이고 말하는 바가 그림인 문자이다. 즉 어느 철학자의 정의를 빌리면 "상형문자는 그것이 기술하는 사실들을 모사한다." 『금강경』이 이와 같다. 즉 1분[보여주기]을 통해 나머지 금강경을 보게되고 2분부터[말하기]의 금강경을 통해 1분을 말하고 있는 금강경이 그것이다. 바로 여기에 금강경이 선사하는 가슴 벅찬 감동이 있다. 『금강경』그자체로 온전한 상형문자인 미학적 요소가 감동이고 동시에 말과 행동, 마음과 몸이 상형문자처럼 하나된 윤리적 모습이 또한 벅찬 감동이다. 생생히 살이있는 상형문자, 금강경의 미학적인 진가와 더불어 한가지 더 강조해 말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의 침묵, 말하지 않음이다. 왜 부처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에 이르러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이 떠오르고(한편 그 말이 이해되고) 또 같은 책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가 얘기한 "윤리학과 미학은 하나이다"라는 명제를 확신하게 되었고, 모진 고초 속에 안경렌즈 세공을 생계로 삼으면서 『에티카』란 윤리학을 사유하며 일상 또한 그대로 살았던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의 삶을 통해 그 침묵의 뜻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스피노자는, 타인들이 그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단지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일깨우고, 보게 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제3의 눈으로서의 증명은 요구하거나 심지어는 설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영감을 얻은 이 자유로운 전망을 위해 안경을 만들거나 안경 렌즈를 세공하려 할 뿐이다[각주:3].


 

  1. 금강경의 내용은 법륜스님의 <금강경이야기>에서 인용한다. 금강경 해설 부분을 인용할 때는 페이지만 표기함. [본문으로]
  2.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과 마하살은 응당 이렇게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한다. 이른바 모든 중생, 예컨대 알로 생겨나는 생명, 태로 생겨나는 생명, 습기 있는 데서 태어나는 생명, 변화해서 나오는 생명, 혹은 모양이 있는 생명, 모양이 없는 생명, 또는 생각이 있는 생명, 생각이 없는 생명, 생각이 있지도 않은 생명,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생명, 모두를 나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열반'에 들게 하겠다. 하지만 나는 이와 같이 한없는 중생을 구제하기는 해도 실은 한 중생도 구한 게 없다. 왜 그럴까, 수보리여! 만일 보살에게 나라는 관념, 사람이라는 관념, 중생이라는 관념 또는 존재라는 관념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 들뢰즈,『스피노자의 철학』p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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