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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고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자유],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청정]"

 고요하지 않아도 고요하고, 자유롭지 않아도 자유롭고, 청정하지 않아도 청정한 마음을 이루는 것에 관하여. 

 

2.

청정한 마음이란 특별한 마음이 아닙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마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으로 마음이 되게 하는 앎의 특성이 청정한 마음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본래의 마음이지요. 그러하기에 마음이 대상에 미혹되지만 않으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한 상태가 되려는 욕망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식 대상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이며, 머물지 않는 흐름을 잡으려 하지도 않기에 무상한 인연에 수순한 마음이며, 수순한 인연 그대로가 마음이 된 마음입니다.[각주:1]

 

3.

청정한 마음은 물들지 않는 마음. 물들지 않는 마음을 위해선 알아차려야한다. 슬픈 마음이 일고 기쁜 마음이 생기면 이를 알아차린다. 기쁘고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은 인연의 총상이 마음 하나로 드러나는 것이니

한 마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그저 알아차린다. 이는 우리가 슬픈 영화를 볼때 슬픈 영화를 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슬픈 영화를 볼때 슬픈 영화를 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슬픔을 공감하면서 슬픔에 빠지지 않게 된다. 눈물이 나도록 슬프지만 슬픈 영화를 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슬픔에 빠지지 않게 된다. 슬픔속에서 슬픔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이라고 한다. 청정한 마음은 고요한 마음이며 동시에 자유로운 마음이다. 슬픔 속에서 슬픔을 알아차리기에 놀라지도 않으며 슬픔에 매이지도 않는다. 일상에서 드는 생각이나 감정도 영화를 보고 있을 때 드는 마음과 다르지 않는 현상이다. 과거의 생각으로 우울해 하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괴로워하는 일들이 다 이와 같은 경우다. 과거의 생각으로 우울해 하는구나를 알아차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괴로워하는구나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눈을 뜨고 꾸는 꿈인줄 알아차려라.

알아차리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기 때문에 지혜의 눈을 열어준다. 

살다보면 괴로움과 두려움을 맞기 마련이다. 이때 괴로움 마음이 들고 두려움 마움이 든다면 이또한 슬픈 영화를 보고 있음을 알아차리듯이 괴로움 마음, 두려운 마음을 알아차린다. 이런 알아차림을 통해 괴로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떻게?

 

4.

 "내가 개인적으로 발견한 것으로, 그런 걱정을 덜어주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먼저 어떤 상황이나 문제가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해결책이 있거나 어려움을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그 문제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해야할 행동은 해결책을 찾는 것뿐입니다. 그 문제로 고민하기보다는 해결책을 찾는 데 힘을 집중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이와는 달리 문제의 해결책도 없고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면, 그것에 대해 걱정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당신은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엔 그 사실을 빨리 받아들이수록 더욱 쉽게 마음이 평화로울 것입니다. 이 원칙은 물론 당신이 직접 문제에 부딪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문제에 해결책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할 테니까요."[각주:2]

 

5.

알아차리는 것은 <금강경>의 가르침처럼, '如夢幻浦影', 마음의 현상을 '꿈, 환영, 거품, 그림자처럼' 보는 것이다. 슬픈 생각이 들면 슬픈 영화를 보듯이 하고, 또 기쁜 마음이 들면 기쁜 영화를 보듯이 하여야 하는데 기쁨도 슬픔처럼 관觀해야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無常!]. 때문에 <금강경>은 곧이어 '如露亦如電'하라고 한다. 이슬과 번개처럼 한 때임을 관해야하는 것이다.

슬픔과 기쁨이 이슬과 번개처럼 영원하지 않고 한 때임을 직시하면 기쁘다고 들뜨지도 슬프다고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할 성격이 아닌 것이다. 새옹지마의 세옹을 기억하는가! 이 변방의 노인처럼 슬픔과 기쁨에도 고요하고 자유롭고 청정한 마음을 이루기 위해 잊지말아야할 것은 알아차리는 것이다. 선禪은, 또는 명상은 알아차리기의 훈련이다. 훈련이 몸에 익으면 숨쉬듯 저절로 알아차리게 될 것이니 명상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다.  

 

깨달았는가? 라는 물음이 부질 없는 이유는 깨달음은 말이 아니라 활동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두고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한다"고 하였고, 중국의 선사들이 말없는 가르침을 편 이유다.   

 

 

  1. 정화스님 풀어씀, <육조단경> p16 [본문으로]
  2.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p2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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