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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이야기를 보고[각주:1] 중도를 이렇게 이해했다.


 산이 하나 있는데 이쪽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 보기에 산이 동쪽에 있으니 동산이라고 하고 저쪽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 보기에 서쪽에 있으니 서산이라고 했다. 이 두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동산이다 서산이다라고 자기주장- 메추라기의 시야 -을 굽히지않고 싸우기까지 한다. 그런데 지나가는 나그네가 이를 보고 말하길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번엔 싸우던 사람들이 나그네와 한판 붙는다. 아니 동산이면 동산이고 서산이면 서산이지 어떻게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냐며 산을 부정하는 것이냐며 쏘아붙인다.
허나 보라. 허공에서 보면 산은 그냥 거기 있을 뿐이다. 그러니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지만 동산도 되고 서산도 되는 것이니 어디로든 자유롭다. 중도란 이런 것이다. 중도란 정해진 길이 아니며 수만 갈래로 만들어질 수 있는 열린 길, 잠재된 길이다. 자 대붕 처럼 날아올라 그 산을 내려보라 그래야만 보인다. 어디에도 메이지 않는 중도가 보이지 않는가?

* p.s. 그렇다면 저 산은 동산인가? 서산인가? 불교식으로 말하면 그 문제는 인연을 따라 정해질 것이다.- 정해진 것은 없다. 인연을 따를 뿐.(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법성게』) 그렇다면 인연이란? 이를테면 "따라서 맑스는 이제 진리의 문제를 현실성과 힘, 차안성을 입증하는 문제로 바꿔 버립니다. 그 물건에 대해 '영원한 진리'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떤 판단이나 지식의 현실성과 타당성(옳음)을 확보하는 것입니다."(『철학과 굴뚝청소부』p207) 본래 정해진 인연이란 있지 않으며 그때그때의 현실성과 타당성이 확보해가는 새로운 시공간을 인연이라 부르는 게 아닐지...                       ** 인연에 관한 바른사유(正思惟)를 위해서 맑스를 비롯해, 니체, 비트겐슈타인, 들뢰즈 등의 서양철학과의 회통을 시도해 볼라 한다.  

 

 

 

  1. MBN 박경철의 <공감플러스>: 법륜스님편(2011.01.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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