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금 막 끌어들인 자기조직화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게 중요해 보이는군요.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네크가 '개인의 정신적 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자발적인 (저절로 생겨나는) 질서를 창출하는 '자기조직화'의 초개인적 (개인을 초월하는) 힘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썼을 때 그는 (자기조직화에 대한) 하나의 휼륭한 정의방법을 제공했다고 보이는데요. 이를 통해서 보면 자기조직화란 질서의 자발적 성립이라고 정위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엄격히 위계적으로 어떤 기업을 조직할 경우 원래 질서라고 하는 것은 늘 의문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요. 경영에서 자기조직화의 개념은 명령을 내리는 우두머리에 의해 행사되는 외적 통제 및 지배에 대한 관념과의 대..
미국 서쪽 해안과 일본의 동쪽 해안 사이에 위치한 미드웨이 섬에서 일본과 미국 간의 유명한 전투가 있었지요. 그때 수적으로 월등한 일본 함대가 미국 함대를 전멸시킬 만큼 위협적이었는데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미국의 기함을 파괴시켰습니다. 원래 그 기함으로부터 모든 명령이 복잡한 통신체계를 통해 다른 전함으로 전달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위계의 최상층부가 파괴되어 버린 거죠. 그런데 놀라운 결과는 모든 미국 측의 개별 함선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그리고 그들 각자의 행동의 신경체계적인 수평적인 연결고리를 알지도 못한 채) 수평적으로 조직화된 사실입니다. 위계적 조직에서 수평적(비위계적) 조직으로 전화된 것이지요. 모든 전함의 승무원들은 자신의 책임 하에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가오는 적함들을 때맞..
비위계적(수평적) 관점에서 보면 기업의 모든 직원들이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경영자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선반작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작업영역에서 생기는 물음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선반이 작동하는지, 어떻게 정해진 직경을 가진 축이 특정 금속으로부터 만들어지는지를 그가 제일 잘 아니까요. 그는 더 이상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새로운 관점은 엄청난 심리적 자유를 보여 줍니다. 비위계적(수평적) 구조라는 개념으로 새로 쓸수 있는 조직구조가 생겨나는 겁니다. 여기서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늘 다른 사람입니다. 내가 늘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이고 다른 사람도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므로 때로는 내가, 때로는 다른 사람이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순..
1. 위계 19세기와 20세기의 전통에서는 기업과 조직은 위계적으로 만들어져야 했습니다. 위계라는 말에는 '신성한 것Heilige(그리스어로는 hieros)이 재배한다herrscht(그리스어로는 archein)'라는 뜻이 들어 있는데 위계질서 속에서는 우두머리가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고 명령은 위에서 아래로 전달됩니다. 기업의 그런 조직은 가톨릭교회의 구조를 따른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교황이 신성한 것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으로서 아랫사람들에게 위로부터 무엇이 말해졌고 무엇이 주어졌는지를 알려 줍니다. 또 위계적인 명령구조라는 개념은 절대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관념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윗사람들이 뭐가 행해져야 하는지를 가장 잘 알고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이러한 명령구조에서..
심리치료의 목적은 당신의 견해에 따르면 고통을 초래하는 현실표상을 덜 고통스럽고 덜 힘든 현실표상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되겠군요. 그런 목적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슬픔의 시간들이 매우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덧붙여야겠습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어떤 사람의 죽음이나 어떤 끔찍한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슬픔의 기간과 슬픔의 예식을 통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완화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 자체가 엊혀 지거나 없어지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을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발명품 123)
가족치료학자인 저의 친구 파울 바츠라빅에게 감사하고 싶은 하나의 예를 통해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는 저에게 얘기 했습니다. 미국에는 정말 중요한 진단 지침서가 있다고요. DSM이라고 하는 것인데 늘 개정판이 나온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책은 동성애라고 불리는 병에 주목했었는데 그 후 개정판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서 동성애를 더 이상 하나의 병으로 분류하지 않기로 결정했답니다. 이런 결정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치유가 된 겁니다. 갑자기 동성애는 정신병의사들이 치유해야 할 병이 아닌 것으로 되어 버렸으니까요. 다분히 그렇습니다. 이 예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병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우리의 문화적 여건에 의해 각인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대답할 수 없는 물음 그리고 하나 이상의 답이 있는 물음은 그들 자신에게도 환영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선생님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고학년 수업에서 시저의 살해에 대해서 얘기가 되고 있는데 한 학생이 고대 로마의 어떤 정치적 상황이 시저의 살해를 초래했는지 알고자 합니다. 이때 선생님이 답을 알고 있지 않다고 가정할 경우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명확하게 혹은 신경질 적으로 반응하거나 아니면 이런 상황을 공동 작업으로의 유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학급의 한두 명쯤이 도서관에서 가서 이 주제에 관한 작은 보고서를 준비하게 될지 모릅니다. 이런 것은 선생님에게도 새로운 것 또는 자신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는 것을 경험할 멋진 기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좀 더 극..
선생님의 모름은 연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름은 이미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선생님 자신이 학생들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학생들이 어떤 것에 관심이 있고 개발되어 마땅한 학생들의 특별한 가능성과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를 뿐입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어떻게 배우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서서 "애들아, 우리는 함께 수학을 알아내기 위해서 여기 있다. 어떤 특정한 규칙에 따라 기능하는 수체계를 만들언 내는 게 가능할까? 수라는 것이 유한한 크기를 가질까 아니면 무한한 크기를 가질까? 우리가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특정 이론을 우리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누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화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솔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