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정할 수 없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건 고차원적 본질의 존재, 삶의 의미, 세계의 성립, 사후의 생 등을 다루는 물음입니다. 그런 질문은 있을 법한 수많은 답을 갖고 있습니다.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이게 어떻게 결정됩니까? 만약 물리학자에게 답을 구하면 쉽게 알게됩니다. 모두가 알듯이 백억 혹은 이백억년 전에 빅뱅(근원적 충돌)이 있었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우주가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충돌의 여음으로 여겨지는 미세한 소음을 거대한 초음파 안테나를 통해서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신앙이 깊은 카톨릭 신자에게 묻는다면 천지 창조의 매일 매일을 기술하는 자세한 창조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만약 인도의 힌두교도에게 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그는 이렇게 ..
결정할 수 있는 질문이란 항상 올바른 답, 가능한 답을 이미 제시하는 어떤 틀 안에서 결정됩니다. 그런 질문의 결정가능성은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들여야하는 특정 게임규칙과 형식을 통해서 보장됩니다. 삼단논법, 문장론(문법), 산술법 등이 그런 형식의 예입니다. 우리는 논리수학적 연결망이라는 틀 속에서 하나으 ㅣ결절점(하나의 문제 혹은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다른 결절점(답 혹은 해법)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2546이라는 숫자가 2로 나누어지는가에 묻는 질문은 즉각 대답 가능합니다. 마지막 숫자가 짝수로 된 수는 2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결정할 수 없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건 고차원적 본질의 존재, 삶의 의미, 세계의 성립, 사후의 생 등을 다루는 물음입니다. 그런 질문은..
그런 묶여있음의 태도 내지 윤리는 어떻게 논쟁적으로 근거 지워질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당신이 윤리에 대한 고찰을 생물학적으로 근거지우려하고 그래서 존재로부터 당위로 나아가는, 기술로 규정을 혼합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당신에 대한 비난은 당신의 주장을 '우리는 지각생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으므로 객관주의자들은 옳지 않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묶여 있다는 입장을 받아 들여야한다'는 형태로 전개시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시간나면 저의 글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유감이지만 제 강연이나 책 어디에도 존재에 대한 지침도 없고 저는 그런 존재로부터 생겨나야하는, 도달해야 할 당위에 대해서 얘기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위에 언급..
제가 볼 때는 객관성과 책임감 있는 행위의 관계는 정확히 거꾸로 살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인식된 객관적 진리를 지침으로 삼는다는 것은 책임감 있는 참여의 토대를 상당 부분 형성하는 것으로 말이지요.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이러이러하니까. 예를 들면, 자연파괴가 실제적으로 진행되니까,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식이죠. 또 거꾸로, 객관적으로 인식 가능한 실재에 대한 이념으로부터 결별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식의 합리화로 해석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도 더 이상 실제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당연합니다. 괴테의 아름다운 시 '산꼭대기 너머에는 안식이 있다' 역시 수십만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 예수의 '누가 한 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내밀어라'는..
당신은 '객관성이란 망상이다. 관찰은 관찰자 없이 행해질 수 없다. 객관성에 대한 호소는 책임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객관성이 선호된다.'라고 썼습니다. 책임을 거부하는 것과 객관성을 요구하는 것은 서로 어떻게 관련되나요? 과학적 활동을 하고 수학적 이론을 수립하고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찰이 무엇인가? 관찰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 아니면 저것이 사실임이, 사물의 이런 관점 아니면 저런 관점이 타당함이 어떻게 확실히 결저되는가'하는 질문들이 중요합니다. 고전적인 경험의 문제에서 출발해서 헤르만 폰 헬름홀츠라는 사람이 19세기에 자기가 볼 때 보편타당한 관찰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어떤 전략을 개발했습니다. 헬름홀츠는 관찰자를 소위 관찰의 위치 즉 뭔가를 조사 연구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어떤 태도나 어떠한 윤리적 실천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선택하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의식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일종의 결정이전의 것(결정 이전에 미리 결정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전을 떨어뜨린 할머니를 보면 아무런 생각 없이 허리 숙여 동전을 주워서 할머니에게 돌려줍니다. 이렇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태도입니다. 만약 젊은 사람이 돈을 떨어뜨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때도 허리 숙여 동전을 줍습니까? 그 젊은이가 스스로 허리 숙여 동전을 주울 힘이 있는데도요? 그를 도우면 우스운 사람이 됩니까? 저는 이에 대해서 이것은 태도의 문제라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미리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누가 동..
1. 그런데 네 번째 세계는 물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주워옵니다. 물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경계도 없습니다. 큰 배든 작은 배든 되는 대로 타고 놀다가 혹여 물에 빠지게 되면 진주조개를 캐옵니다. 해녀가 조개 캐러 물에 뛰어드는 걸 보고 물에 빠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물에 빠지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물에 빠졌지만 사실은 물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물 속에 있지만 허우적대지 않잖아요. 이것이 사사무애법계 세상 속에서 걸림 없는 자유를 누리는 세계입니다. (180) 2. 그런데 원효는 일체가 유심조라는 것,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다는 것을 이전에 이미 경전을 보고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지만 실재에 닥쳐서는 해골바가지 물이 더럽다고 여겨 토해버렸으니 이것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은 선생님의 고찰들에서 윤리적 규범을 이끌어 내기를 제안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을 창조하거나 보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라.' 마뚜라나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규범의 정식화는 윤리를 도덕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나는 우리 대화의 이 지점에서 , 우리가 윤리와 도덕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비록 이러한 구분이 언뜻 보기에 다소간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해도 말입니다. 도덕론자들은 규칙들의 고수를 지지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진술들과 이상한 생각들에 권위에 부여해 주는 외적 준거로 간주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책임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합니다. 도덕론자로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동시대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