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나는 내 견해를 유아론적으로 바라보는 이 분류(법)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군요. 다시 말해둡니다. 나는 관찰자이며, 외부 세계의 체험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며, 공통적인 담론의 체험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체험을 부인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말입니다.[유아론이 아니며] 그러나 나는 신경체계의 작동들이 이 외부 세계와 그 특징들에 어떠한 의미있는 방식으로 관련될 수 있다거나 또는 그 작동들이 그러한 특징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것에는 힘주어 반대합니다.[실재론도 아닌] 신경체계는 폐쇄적인 체계로서 작동합니다. 즉, 신경체계는 활동의 신경 상태들 사이의 또 다른 변화하는 관계들을 끊임없이 낳는 활동의 신경 상태들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들의 폐쇄적인 체계로서 작동합니다. 하나의 체계로서의 그것의 ..
1. 이 의견도 얼핏 이상하고 모호하게 들립니다. 어쨌든 고전적인 견해는 유기체의 신경체계를 개방된 체계로 정의합니다. 수용체들은 외부의 자극들에 의한 흥분에 반응하고, 그 다음에 이 외부 자극들이 다음 단계에서 처리된다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이러한 견해는 실재 세계를 다소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나와 생각을 함께하고 그 생각을 자신의 성찰을 위한 기초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우선, 한때 생물학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가 신경체계를 이해하는 데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하지 못한, '정보처리' 개념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랫동안, 유기체의 신경체계가 외부로부터 오는 정보를 처리해서 이 유기체의 적절한 행위를 발생시킨다는 게 지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환경에 위치하는..
하지만 나는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 덕분에 내 대학 동료들은 내 정신 상태를 심각하게 의심하기도 했지요.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나는 망막의 활동이 (일정한 체험을 나타내는) 색채들의 이름들과 연결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그리고 망막의 활동과 색채들의 이름들 사이에, 다시 말해 신경체계 내부의 다양한 활동 상태를 사이에 내적인 상호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이상한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 내 연구의 목적 및 전통적인 관점과 관련해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나는 기존의 지각 연구의 전통들의 바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나는 다음과 같은 인식론적 물음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신경체계를 하나의 폐쇄된 체..
1. 자유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주어지는 대로 한다는 뜻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것은 욕구입니다. 욕구대로 살고자 하면 왕의 길을 가야 해요. 그러나 화작이란 자기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환경이 주어지는 대로 그 조건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화작을 하게 되면 어디를 가도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왕의 자유는 권력을 갖고 있을 때만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비난과 보복이라는 과보가 따르게 됩니다. T. 욕구에 기초한 자유와 욕구로부터의 자유. 선택은 자유다. 내 생각에,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어떤 선택이든 좋다. 단 욕구에 기초한 자유는 [중단되지 않으려면] ..
폐쇄적이고,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인 우리가 조화로운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체계들이 구조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하나의 외적 작용체는 체계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변화는 섭동하는 작용체에 의해 유발되지만 섭동 체계의 구조에 의해 결정됩니다. 지시명령적 상호작용은 불가능합니다. (함으로 138) T. 지시명령적 상호작용은 불가능하다. 남에 인생에 간섭하지 마라. 남을 제도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것은 불가능하니) "남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1. 결국은 모두 심리적 위안의 문제입니다. 스님이라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그 결정에 위안이 좀 되는 겁니다. 저울대가 왔다갔다할 때 스님이 한쪽을 살짝 눌려주면 그렇게 기..
1. 우리는 그와 같은 절대적 실재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와 동시에 '그것[물자체]을 알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불합리한 개념적 곡예입니다. 하지만 내가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때, 나는 또 다른 핵심적인 질문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실재, 진리, 그리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철학적 담론 체계를 변화시킵니다. 이 질문은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고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외부 실재의 연구와는 더 이상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로 작동함으로써 관찰자의 작동들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언어 속에서 살아감으로써 언어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요컨대 우리..
1. 나는 우리의 체험들을 낳고 형성하는 작동들을 이해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작동들을 설명하는 바로 그 행동 속에서 명확해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서술하는 대상들과 실체들로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함으로 53) 2. 흔들리는 것은 깃발이 아니라 마음이다. 3. 우리는 우리가 산출하는 것을 보고 있다. 4. [체험] 볼때는 봄만이 있다. 5. 실제 일어나는 것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한 채 오직 변이 뿐인 데, 주체와 대상의 분별을 체험[인식]한다. 이 체험이, 분리할 수 없는 가운데 분리를 구분하는 기묘한 작동이다. 이 기묘한 작동에서 중심을 잡는 '이중보기', '환상처럼 보기'의 중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