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이다. 그 사람을 나쁜 인간으로 보는 것은 내 문제지, 그 사람 자체가 나쁜 사람인 건 아니다. 내 관점에서 나쁜 것이다. 그런데 나의 관점은 확실성을 고집할 수 없다. 다른 관점 역시 나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의 관점은 맞고 다른 관점은 틀린 것이 아니라(그 반대 역시도) 서로 다를 뿐이다. 내가 보기에 핵심은 연결과 공존이다. 다툼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데 사람다움(행복)이 있다. 그 사람을 나쁘게 보고 미워한다면 미워하는 과보를 받아야한다. 그런데 나에게 나쁘게 보이나 내 관점의 확실성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나쁘게 보고 미워하는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니 미워해서 받을 과보가 없다. 괴로움이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 일 뿐이다'는 앎과 '그 사람을 나..
확실성의 유혹 이중보기. 환상처럼보기. 확실성을 버릴 준비. 이무소득고 무주상보시. 미적인 유혹.

앎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앎의 앎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산출한다. 다이너마이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다이나마이트의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즉 "폭탄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 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하는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폭탄을 범죄의 도구로 쓰는 것은 나쁜 것이고, 필요한 길을 내는 데 쓰는 것은 좋은 것일 수 있다. 이 앎의 앎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책임질 세상이다. '선악을 너머',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을 너머'를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 ) 허나 한가지 덮붙일 말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때로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나쁜 것이 좋은..
나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의 창이나는 실재들이 존재하다고 인식하면서 살 수 있나요? 무한하게 다양한 가능 세계들을 규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불가피하게 무산되고 완전한 방향 상실에 빠질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문제는 확실한 문제에 매달리는 것도,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것도, 다양한 현상들을 하나의 개념, 아니 심지어 유일한 개념으로 범주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볼 때 핵심 문제는 기대하지 못한 어떤 것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우리의 확실성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망스러운 체험들이 꼭 깊은 좌절과 분노로 연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체험들이 정말 극적으로 새로운 전망들을 열어젖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들이 충족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너무 흥분하지 않고 ..
괄호 친 객관성에 대해 말함으로써 나는 모든 사람들이, 관찰자와 독립적인 준거점을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나는 우리와 독립적인 객체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체험을 구상해 보고 싶습니다. 이 괄호들은 어떤 깨달음의 상태를 가르키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말해지는 모든 것이 우리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고 또 우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는 객체들을 우리와 구분되는 것으로 체험할 수 있는가?'(함으로 66) T. 에서는 분리될 수 없음을 청정으로, 구분되는 체험을 분별로 대비시킬 수 있겠다. 위의 질문에 답을 설명하는 두 개의 방식에 주목해보자.
내가 볼 때 '관찰하기'란, 자기가 무언가를 관찰하는 데 관련되어 있다는 자각과 함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인간적 작동입니다. 새를 단지 노려보고만 있는 고양이는 나에게는 관찰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단지 새를 주시할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 고양이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없으며, 또는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고 적절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고양이는 적절하게 또는 부적절하게 행동할 수는 있어도 그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성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관찰하기는 자기성찰이라는 말이죠? 맞습니다. 관찰자는 무언가를 구분하기 위해 어떤 구분을 사용할 때 자기의식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보..
마뚜라나의 설명 하인즈의 설명 [무아]실체는 없는데 작용은 있는. 이 작용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은 마뚜라나. "나는 우리의 체험들을 낳고 형성하는 작동들을 이해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작동들을 설명하는 바로 그 행동 속에서 명확해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서술하는 대상들과 실체들로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53)" 바로 그렇습니다. 어떤 것을 미쳤다고 부르는 것은 우리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지각들과 체험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체험들을 거부하거나 평가절하하자는 것이 내 의도가 아닙니다. 체험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설명하고 싶은 것은 작동들입니다. 체험들이 그것들을 통해 나타나는 작동들 말입니다. (함으로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