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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는 마음이 부드럽게 되고 관계에서 조화로운 삶을 열어 교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다른 사람에 의해서 괴롭게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익입니다. 부처님의 지혜가 완성된 수행자의 마음을 '원함이 없는 마음[無願]''머물지 않는 마음'곧'얽매이지 않는 마음[無住心]''얻음이 없는 마음[無得]'이라고도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이를 재단하지 않는 마음이며, 재단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마음이지요. 인연의 만남에서 어떤 것을 의도하고 그 인연을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물지 않고 얻지 않는 마음이 인연의 조화에 어울리는 마음이면서 인연을 온통 다 드러내는 마음입니다. 무엇으로 인연이 된 듯하지만 인연의 장은 언제나 다시 무엇들을 변하게 하는 힘으로 하나의 인연을 넘어서므로 인연으로 그렇게 흐릅니다.

인연에 깨어 있는 마음은 조화로운 마음이며 교만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인연을 비켜서 있는 듯한 '나'를 세울 때는 조화롭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지만 허망한 삶일 분이지요. 어찌 인연을 벗어날 수 있으며 인연에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교만심이 있는 한 인연을 알 수 없고, 인연을 알지 못하는 한 '나'를 알지 못하지요.

무엇으로 교만할 수 있는 나를 '나'로 착각하는 것일 뿐, 언제나 인연으로 드러나 층위를 넘나들며 어떤 층위에도 머물지 않는 '나', 무화無化의 인연으로 층위를 갖지 않는 '나'는 교만한 마음으로 잡히지 않는 '나'이며, 엿볼 수조차 없는 '나'입니다.

'나'이면서 '나'일 수 없는 데서 조화로운 인연이 있고, 조화로운 인연의 삶에는 교만심이 들어설 틈이 없으며, 열린 생명 관계가 '나'인 줄 아는 마음은 인연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나'를 드러내니, 나와 다른 이를 힘들게 하지 않지요.

수행으로 나와 남을 넘어서는 데서 나와 남이 함께 여래의 삶을 이루어, 부드럽고 조화로우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므로 이익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각주:1]

 

T1000.0 : 세상일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니 마음을 내려놓고 인연의 흐름에 따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에 상관없이 내 맘대로 되는 것이다. 결과는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내 맘대로 하려는 거친 마음이 교만이고 내 맘 내려놓고 조화를 이루는 부드러운 마음이 무원無願, 무주심無住心, 무득無得이다.    

관계에서 조화로운 삶이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순수하며 검소하다. 이 겸손, 순수, 검소는 금욕적인 덕목으로서가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이 지니는 무원[겸손], 무주심[순수], 무득[검소]의 다른 이름으로 드러낼 뿐인데,

 

니체는, 자기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에 한 철학자의 생애를 신비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철학자는 금욕적인 덕목들-겸손, 검소, 순수-을 독점하여, 그것들을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실제로는 거의 금욕적이지 않은 목적들에 사용한다. 철학자는 그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삼는다. 철학자에게는 그것들은 도덕적 목적들도, 또 다른 삶을 위한 종교적 수단들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그 자체의 '결과들'이다. 철학자에게는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겸손, 검소, 순수는 이제 아주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삶, 능력으로 충만한 삶의 결과들이 되어, 사유를 정복하고 다른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욕구에 기초해서, 단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더 이상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해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겸손, 검소, 순수 이것들은 그[철학자]에게는 현자가 되는 방식이고, 자신의 신체를 지나치게 오만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지나치게 육감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철학자를 공격할 때, 사람들은 우습게도 겸손, 검소, 순수의 외양만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능력한 분노만을 배가시킬 뿐이다. 철학자는 어떤 빌미도 주지 않지만, 온갖 공격을 받는다.[각주:2]

 

T1000.0 : 여기 철학자의 모습은 수행자와 그 이름이 다를 뿐 동일하다. 사유를 정복하고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삶을 자연이라 불렀는데 자연의 활동인 인연에 계합하는 것이 수행이며 수행은 몸말맘을 욕감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든다는 점들이 표현을 다르지만 회통하고 있다.

 

 

  1. <대승기신론2> p418 [본문으로]
  2. 들뢰즈지음, <스피노자의 철학> p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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