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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장모에게 배신을 당해 괴롭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연기법 등을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이해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제가 당한 큰일에는 법문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아내와 장모로부터 엄청난 배신과 경제적 타격을 받은 것을 도저히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이 괴로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여기 어떤 물질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한 숟가락 먹으면 죽는다고 해서 독이라고 했는데, 그 물질을 어떤 약을 먹어도 치료가 안 되는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조금 먹였더니 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러면 특효약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런 일은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실제로 그 물질에 약성과 독성이 있을까요? 약성과 독성이 있다면, 독성이 있다가 약성으로 바뀌고, 약성이 있다가 독성으로 바뀐다는 건데, 이 말은 이론적으로 안 맞습니다. 본래 그 물질에는 ‘약이다’ ‘독이다’ 하는 실체가 없어요. 어떤 조건에서는 독성으로 작용할 때도 있고, 약성으로 작용할 때도 있는 겁니다. 본래 약성이다, 독성이다 할 게 없다는 것을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소승에서는 ‘무아(無我)’라고 표현했어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약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독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핵심 내용이에요.

그런데 제가 즉문즉설을 할 때는 공이니 색이니 무아니 무상이니 이런 용어를 안 쓰잖아요. 즉문즉설은 일상용어를 사용하니까 이해하기가 쉬운데, 지금 질문자는 경전반에 입학해서 이런 불교철학 용어들을 배우다 보니 그 뜻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겁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방법

그럼 이제 현실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한번 해 봅시다. 전 부인은 처음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할 때는 질문자한테 좋은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결혼할 때부터 아주 나쁜 사람이었어요?”

“아니요. 처음에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 돈을 가져가고, 나를 속이고, 나쁜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면 전 부인이 원래 좋은 사람인데 변해서 나쁜 사람이 된 거예요?”

“...”

“전 부인은 예전에는 질문자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였는데 지금은 질문자한테 손해가 되는 관계가 된 겁니다. 즉 과거에는 약성으로 작용을 했는데, 지금은 독성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전에는 좋은 여자라고 했다가 지금은 나쁜 여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의 가르침으로 설명하면, 전 부인은 본래 좋은 여자도 아니고 나쁜 여자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에요. 전 부인은 전 부인 나름대로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사는 사람입니다.

옛날 인연의 조건에서는 질문자에게 아내가 좋게 작용을 하니까 좋은 여자라고 했다가 지금의 조건에서는 질문자한테 손해가 되는 관계로 작용하니까 나쁜 여자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본래 좋고 나쁜 건 없습니다. 지금 나와의 관계에서 이렇게 작용할 뿐이에요. 그래서 만약 질문자가 손해난 것이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해야 되고, 방법을 강구하면 질문자가 손해 본 것 중에 일부를 되찾을 수 있겠다면 노력을 해야 되는 거예요. 가능성이 있으면 노력을 해야 되고, 가능성이 없으면 포기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능성이 없는데 자꾸 노력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이유

포기를 해도 되고, 노력을 해도 되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은 미워하는 거예요. 배신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상대를 미워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은 미워할 게 없어요. 사람이 관계를 맺다 보면 이익이 될 때도 있고 손해가 될 때도 있는 겁니다.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기쁨의 윤리학이 될 수 밖에 없다. 오직 기쁨만이 가치가 있으며, 오직 기쁨만이 능동과 능동의 지복에 가까이 있고 또 우리를 가까이 가게 만든다. 슬픈정념은 언제나 무능력에 속한다. (스피노자의 철학 47)]

예를 들어 주식을 사면 주가가 올라갈 때는 좋아했다가 떨어지면 기분이 팍 나빠집니다. 그렇다고 주식을 미워하지는 않잖아요. 주식한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처럼 여자라고 하는 주식을 샀다고 생각해 보세요. 처음에는 주가가 좀 올라가서 덕을 보기 때문에 잘 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가가 팍 떨어져서 후회가 되는 거예요. 후회가 되면 주식을 팔든지, 나중에 또 오를지도 모르니까 좀 더 가지고 있어 보든지, 질문자가 선택하면 되지 주식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법문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거예요. 전 부인을 미워하는 것은 공부를 하다 보면 없어집니다. 그렇다고 전 부인과의 관계에서 손해 본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마라는 뜻은 아니에요. 손해 본 것을 되찾을 수 있으면 노력해서 되찾으면 됩니다. 그러나 지금 노력한다고 되찾아지는 게 아닌데도 계속 붙잡고 있으면 바보예요. 그때는 포기를 해야 됩니다. 포기를 해도 되고, 노력을 해도 되는데, 다만 미워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에요.”

“아내는 장모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장모는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딸을 키운 대가를 저와의 결혼 생활을 통해서 몇 배로 벌려고 했던 겁니다. 제가 대기업을 다녀서 돈도 좀 벌었기 때문에 아내는 그 돈의 대부분을 처갓집으로 몰래 가져갔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집에서 셋째 아들인데, 그 와중에 저희 부모님과 두 형님이 사정이 어려워져서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수십 년간 모르고 살다가 나중에 알게 되어서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혼하고 나서 제가 아내를 다시 사랑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원래부터 집사람을 굉장히 좋아했었거든요. 집사람도 사실은 저를 그렇게 싫어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싫어하니까 집사람도 실망하고 떠난 거죠.”


“네,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서로 좋아서 결혼을 했으면 누가 벌어도 공동의 돈인데 그 돈이 시댁에 가듯이 처가에도 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처가에 가는 돈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다 싶어 이혼을 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왜 미워하고 원망하느냐 이 말이에요.”

“제가 수십 년간 처가에 가는 돈을 전혀 몰랐어요.”

“그건 질문자가 바보라서 그런 거죠.”

“네, 제가 바보 같았습니다.”

“그러면 ‘내가 바보였구나’ 이렇게 알고 끝내야죠.”

“제 통장을 완전히 와이프에게 맡기고 살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거죠.”

“그걸 모른 건 질문자가 바보인 거죠. 가족이 죽어도 내가 모르면 살아있다고 하듯이 돈이 처가에 가도 내가 모르면 나한테 돈이 있는 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돈이 처가에 가 버렸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찾아올 수 있으면 찾아오고, 못 찾아오면 포기를 해야죠.”

“제가 모르고 살았으면 괜찮은데 알아버리니까 문제가 된 거죠.”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요. 제가 말하는 요점은 지나간 일을 두고 왜 미워하느냐 이 말입니다. 질문자가 부인을 미워하면 부인이 괴로울까요? 질문자가 괴로울까요?”

“제가 괴롭습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일을 뭐 때문에 하느냐 이 말이에요.”

“원래 제가 신혼 때 부인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아직도 좋아하는 감정은 있습니다.”

“좋아하니까 미워지겠죠. 질문자가 지금 저에게 질문한 것은 반야심경 공부가 일상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거잖아요. 그에 대한 대답을 제가 하는 겁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겠구나

장모는 딸을 이용해서 돈 좀 벌려고 한 거예요. 장모가 보기에는 사위가 셋째 아들이니까 시가에 신경을 안 써도 될 줄 알고 돈이 100퍼센트 자기에게 올 줄 알았는데 70퍼센트만 오고 30퍼센트는 안 온 상황인 겁니다. 그래서 장모는 자기 나름대로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 사람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장모는 자기 재주껏 돈을 확보한 것이지 장모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예요. 딸을 돈 잘 버는 사람한테 시집보내서 그 돈을 자기가 가져오겠다는 목표를 세운 겁니다. 질문자는 지금 손해가 났으니까 기분이 나쁜 것인데, 제가 옆에서 봤을 때는 ‘장모가 재주 좋네’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네. 그런데 그 와중에 저희 부모님은 돈이 없어서 고생을 하셨거든요.”

“그것은 질문자와 질문자의 부모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겁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기 소원대로 다 못 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내는 자기를 키워준 어머니가 고마워서 가능하면 어머니 말을 안 거스르고 들으려고 하는 성향이 있는 겁니다. 남편을 좋아하는 것보다 어머니의 은혜에 메여있는 게 더 크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삼자 간에 누구는 좋은 사람이고 누구는 나쁜 사람이라고 할 게 없습니다. 각각 이해관계가 다를 뿐이에요.

결과적으로 돈 때문에 이혼을 하는 결론이 났으면 이런 인연은 해체시키는 게 좋습니다. 각각의 인연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잃어버린 돈을 되찾아올 수 없으면 포기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질문자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면 돼요.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는 것은 어젯밤에 강도 만난 꿈을 꾼 것을 갖고 지금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야심경 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이렇게 깨달아야 해요.

‘두 여자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여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내가 자기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사람은 서로 자기 생각만 하고 살아가는구나. 부처님이 옳고 그름은 본래 없고 인연을 따라서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그 말이 맞는구나.’

이렇게 깨닫고 과거를 툭 털어버리고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면 반야심경을 공부한 효과가 있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어디 가서 반야심경 공부한다고 자랑을 하면서도 늘 아내와 장모를 미워하고 욕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공부를 하나 마나인 거예요.”

“어떨 때는 용서가 되는데, 어떨 때는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용서한다는 것은 전 부인이 잘못했는데 질문자가 봐준다는 뜻입니다. 전 부인이 잘못한 게 아니라 자기 딴에는 잘한다고 한 행동입니다. 장모는 장모 나름대로 재주를 피워서 한 행동입니다. 전 부인은 키워준 어머니의 은혜를 갚는다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잘한 거예요. 그러니 전 부인과 장모 둘 다 잘못한 것도 없고, 용서할 것도 없어요, 각자 인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이해관계가 지금 안 맞아떨어진 거예요.”

“사실 아내도 저를 좋아했었어요. 중간에 장모가 그런 역할을 하는 바람에 이혼을 하게 된 거죠.”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 같네요. 아내와 장모를 자꾸 그렇게 분리해서 보면 안 됩니다. ‘아내는 착한데 장모가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아내와 장모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장모를 포기하면 아내도 포기해야 하고, 아내를 가지려면 장모도 같이 갖는 마음을 내야 해요. 질문자가 장모까지 안고 갈 수 없으면 아내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미련을 버려야 돼요. 지금 질문자는 약간 정신적으로 공허한 상태 같아요.”

“네, 맞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미련을 못 버리고 전전긍긍하면서 살면, 질문자의 남은 인생도 자꾸 초라해져요.”

“신혼 때부터 20년간 다른 여자는 안 쳐다볼 정도로 집사람만 굉장히 좋아한 상태에서 이렇게 단절이 되니까 제 인생이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아요.”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에 열렬히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좋은 게 나중에도 반드시 좋은 게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어떤 여자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여자가 죽어도 이렇게 공허한 상태가 안 되었을 겁니다. 뭐 때문에 열렬히 사랑해서 열렬히 미워하는 거예요?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에 열렬히 미워하는 과보를 고통스럽게 받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저같이 현명한 사람은 좋아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좀 해 보면 어때요?”

“스님께서 즐거움을 추구하면 그에 반대되는 괴로움이 따라온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지금 저에게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걸 알았다면 이제 정신을 차려야죠. 지나간 일은 한 여름밤의 꿈처럼 딱 버리세요.

‘열렬히 사랑도 한번 해봤고, 열렬히 괴로워도 한번 해 봤으니까, 중생 노름 충분히 해봤구나. 앞으로는 열렬히 사랑할 것도 없고, 열렬히 미워할 것도 없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아야겠다.’

이렇게 관점을 한번 바꾸어 살아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는 마침내 환한 미소를 보였습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자가 관점을 확실하게 바꿀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관점만 바꾸면 인생이 홀가분해집니다

“불교 공부가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평생 지어온 삶의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습관대로 살아서 괴로움에 빠져 산다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루를 살아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돈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돈에 너무 메이지 마라는 겁니다. 지위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지위에 너무 메이지 마라는 거예요. 나이 드는 게 좋다는 게 아니라 나이 드는 대로 그냥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부처님은 있는 부인도 버리고, 있는 자식도 버리고, 있는 돈도 버리고, 있는 지위도 버리고 출가를 해야 했는데, 질문자는 아내가 알아서 집을 나가 버렸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 돈을 뺏겨서 괴로운 게 아니고 아직 집착이 덜 버려져서 괴로운 거예요. 출가를 하려면 돈을 버려야 하는데, 아내와 장모가 돈을 가져가 버리니까 버리기가 얼마나 쉬워졌습니까. 집안 청소를 하려면 혼자서 다 치워야 하는데 아내와 장모가 가구의 3분의 1은 가져가 버렸으니 청소하기가 얼마나 쉬워졌어요?

생각을 이렇게 좀 바꿔 보세요.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서 다시 보면, 아내와 장모는 굉장히 고마운 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자가 원래 갖다 버리려고 했는데, 그들이 알아서 다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질문자 해야 할 일을 많이 덜어진 겁니다.

‘가져가 줘서 고마워. 안 그래도 내가 다 갖다 버리려고 했는데 재활용해서 쓰겠다고 가져가 주니 고마워.’

이렇게 생각을 탁 바꾸세요. 그래야 내 속에 있는 미움과 원망이 없어져요. ‘용서해준다’ 자꾸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오늘은 용서했다가 내일 아침엔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진심으로 ‘다 가져가서 고맙다. 가져가려면 싹 다 가져가지 왜 남겨 놓고 갔을까?’ 이렇게 생각을 해야 돼요. 그래야 질문자의 인생이 홀가분해져요.

한 때 한 여자를 열렬히 사랑했고, 돈 좀 벌어서 살아 봤고, 이런 것들은 눈 감을 때 다시 돌아보면 다 꿈이에요. 어차피 다 버리고 가야 해요. 죽기 전에 조금 일찍 버렸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젊을 때 일찍 버렸고, 질문자는 부처님보다 조금 늦게 버린 겁니다. 그래도 죽기 전에 버린 거예요. 여기 있는 어떤 사람도 죽을 때는 다 버리고 가야 해요. 한국에서 최고의 부자라는 사람도 죽을 때 동전 한 닢도 못 가져갔어요, 어차피 다 버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 일찍 버린 것 갖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점을 이렇게 가져보세요. 질문자가 불행한 조건에 처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사세요.”

<스님의 하루 201220>


T.

독과 약이 본래 따로 없다. 아내는 본래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닌 걸, 아내를 독이다, 아내가 나쁘다, 용서할 수 없다 한다. 정말 내 몸에 아내가 독으로 작용한다면 독을 끊어야 할 것이지 독이 약으로 바뀌길 바랄 바가 아니다. 대신 아내의 독이 나에게 약이 되려면 나를 바꾸면 된다. 그 독이 나를 바꿀 중요한 계기이자 새로운 길이 열릴 구원임을, 정녕 바로 앞에서도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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