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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나눌 수 없는 하나를 둘로 나눠 둘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대상화, 타자화하며 소외시킨다.

소외는 소유를 유발하는데,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눈 것이기에 대상도, 타자도, 소외도, 소유도 없고

오직 하나의 흐름, 물결치는 흐름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우리의 삶자체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에 언어의 사용을 무분별의 분별이 되도록 해야한다.

언어가 분별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는 것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한다.

 

이러할 때 비로소 언어 역시 흐름임을 깨닫게 된다. 

마뚜라나의 통찰이 주목하듯이, 언어는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이다. 언어가 출현하는 때는 바로 조정의 조정이 이루어질 때이며

이것이 순환하여 배치를 이루면 대상이 출현한다[이름 붙여진다]. 대상이 먼저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언어를 통해 대상이 출현한다. 이는 언어가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의 흐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임을 드러내준다." 요컨대 언어를 무분별의 분별로 사용할 때 언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감을 깨닫게 된다. [삶과 마찬가지로] 언어 역시 번뇌이자 보리이며, 중생이자 부처라고 할 수 있다. 언어를 떠나서 따로 구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언어 속에서 언어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 무분별의 분별이다.

 

소유 역시 언어의 분별을 통해 알 수 있듯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 대상화하고, 타자를 소외시켜 소유를 고집하고 있다. 

때문에 소유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무소유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소유를 하게된다. 그러나 그것은 무소유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무소유의 소유란 나와 내 것이라 할 게 본래 없기 때문에 나와 내 것에 집착하지않는 것이다. 언제든 필요할 때 가볍게 내려놓을 줄 알아야 무소유의 소유라 할 수 있다. 간간히 몇 천억의 거액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부하는 부자들이 있다. 이 부자들의 기부는 아주 가벼운 선택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볍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며 후회는 당연히 없다. 만약 일말의 후회가 있다면 명예를 얻기 위한 포기[댓가]이니 소유 아닌 소유이다. 그러므로 소유를 무소유의 소유가 되도록 하자. 무소유의 소유는 욕망이며 욕망은 소유하지 않는다. 욕망은 소유가 목적이 아니며 욕망 그자체가 목적이다. 반면 소유는 집착과 짝이다. 소유가 목적인 것은 욕망이 아니라 집착임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욕망이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무소유의 소유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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