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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엄마의 인정을 구하는 이런 욕망은 엄마의 욕망만을 뜻하진 않는다. 엄마의 욕망의 대상인 아버지의 욕망을 뜻하기도 하고, 엄마나 아버지가 욕망하는 사회적 안정('아, 따님이 서울대 들어갔다면서요? 좋겠다아~'하는 애길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아~)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엄마의 인정을 구하는 인정욕망은 이런 식으로 아버지나 사회의 인정을 구하는 욕망으로 확장된다. 결국 '나의 욕망'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사실상 엄마, 아버지, 사회 등 '타자'의 욕망이란 것이다. 인정욕망이 그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돈이나 명예, 출세, 혹은 안정된 가정에 대한 욕망 등이 모두 그런 식으로 내 욕망이 된다. 그것은 무의식이라는 심층의 깊이에 까지 침투한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이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삶을 위한 철학수업 224)
2.
말을 바꿔 무의식이 타자의 욕망이라면, 타자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무의식으로 채운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무의식의 정복(?)
"어떻게 하면 마음을 항복받을 수 있을까"라는 <금강경>의 수보리의 물음은 이제 이렇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무의식을 항복받을 수 있을까?" <금강경>은 이에 대한 근본적인 길안내로 읽을 수 있다.
3.
반면 자긍심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긍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의 시선, 자신의 척도에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남의 인정을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잘했는지,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 삶에 자긍심을 가진 이라면, 가난을 감추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며, 가난이 드러난다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자신이 선택한 것의 일부고, 자신이 긍정하려는 것이니까, 왜 그런 식으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굳이 해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랄 것이고, 누가 오해할까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김상용의 시에서처럼 "왜 사냐건 웃지요" 식으로 여유 있는 웃음 한 번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직 자기가 세운 기준만이 자기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자 그럼 다시 한번'하며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를일으켜 세우고 새로 시작하도록 촉발할 것이다.
(232)
4.
인정 욕망의 욕망이 타자라는 밖을 향해 있다면 자기 삶을 긍정하는 욕망은 안을 향하고 있다. 내재성에 기반한.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며 자신만의 잣대로 엄격하게 자기 욕망의 주인으로 선택과 책임을 긍정하는.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말하면서 알듯 모를 듯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내재성은 무의식 그 자체이며, 무의식의 정복이다."(47)
물론 엄마의 인정을 구하는 이런 욕망은 엄마의 욕망만을 뜻하진 않는다. 엄마의 욕망의 대상인 아버지의 욕망을 뜻하기도 하고, 엄마나 아버지가 욕망하는 사회적 안정('아, 따님이 서울대 들어갔다면서요? 좋겠다아~'하는 애길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아~)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엄마의 인정을 구하는 인정욕망은 이런 식으로 아버지나 사회의 인정을 구하는 욕망으로 확장된다. 결국 '나의 욕망'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사실상 엄마, 아버지, 사회 등 '타자'의 욕망이란 것이다. 인정욕망이 그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돈이나 명예, 출세, 혹은 안정된 가정에 대한 욕망 등이 모두 그런 식으로 내 욕망이 된다. 그것은 무의식이라는 심층의 깊이에 까지 침투한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이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삶을 위한 철학수업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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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바꿔 무의식이 타자의 욕망이라면, 타자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무의식으로 채운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무의식의 정복(?)
"어떻게 하면 마음을 항복받을 수 있을까"라는 <금강경>의 수보리의 물음은 이제 이렇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무의식을 항복받을 수 있을까?" <금강경>은 이에 대한 근본적인 길안내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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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자긍심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긍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의 시선, 자신의 척도에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남의 인정을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잘했는지,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 삶에 자긍심을 가진 이라면, 가난을 감추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며, 가난이 드러난다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자신이 선택한 것의 일부고, 자신이 긍정하려는 것이니까, 왜 그런 식으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굳이 해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랄 것이고, 누가 오해할까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김상용의 시에서처럼 "왜 사냐건 웃지요" 식으로 여유 있는 웃음 한 번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직 자기가 세운 기준만이 자기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자 그럼 다시 한번'하며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를일으켜 세우고 새로 시작하도록 촉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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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욕망의 욕망이 타자라는 밖을 향해 있다면 자기 삶을 긍정하는 욕망은 안을 향하고 있다. 내재성에 기반한.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며 자신만의 잣대로 엄격하게 자기 욕망의 주인으로 선택과 책임을 긍정하는.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말하면서 알듯 모를 듯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내재성은 무의식 그 자체이며, 무의식의 정복이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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