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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깨달음'도 '깨닫지 못함'도 없었습니다. 인연의 흐름만이 있습니다. 인연에서 형성된 앎의 기억이 현재의 앎을 가리면서 현재가 어둡게 되어, '깨달음'과 '무명'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무명이 형성됨으로써 깨달음에 대한 이해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수행으로 시각始覺을 지날 때 비로소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인연이 각성임을 자각합니다. 법의 본바탕이 밝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각이 무명화됐다고 하기 보다는 깨달음으로 인하여 본각도 무명도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각의 깨달음이 없다고 하면 무명이 무명일 수 없으며, 본각도 본각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삶을 새롭게 보는 근본적인 전환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시각의 체험으로써 법의 본바탕조차 깨달음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과 상대하여 무명이 본성을 잘못 이해한 앎의 작용인 것도 드러납니다.
인연의 법계가 아상我相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요달了達하고, 아상이 인연의 빈 자리를 잘못 차지하고 있는 줄 알 때, 지혜인 밝고 맑은 앎이 완성됩니다. 마음 하나에 피어나는 깨달음으로 아상我相이 원래부터 인연의 각성에는 자리할 수 없다는 것, 곧 빈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인연의 소통에 걸림 없는 밝은 길이 빈 마음임을 알고[解], 아상을 비운 앎을 실천하는 것[行]이 법성에 계합하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수행입니다. 1
1.
본각도 없고 무명도 없는 '무無'에서 시각의 체험을 통해 본각도 있고 무명도 있는 '유有'가 생겨난다.
무'도 인연의 흐름이고 '유'도 인연의 흐름이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나? 무의 인연의 흐름이 있었다.
태초[無]를 알게한 것은 지금[有]이고 지금의 체험[앎]이 없으면 태초도 없다.
인연의 흐름만이 있을 뿐.
2.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부처님은 오온이 나라고 하였는데 오온이 공함을 조견하게한 반야바라밀은 '나'와 나의 '것'이 없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마하반야, 큰 지혜.
- <대승기신론2> p29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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