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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착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악한 마음이 일어나면 또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십시오. 그때는 착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요 악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이때 선악의 선별이 사라지고 빈 마음의 법계 부처님이 온갖 마음으로 나툰 것이니 마음 마음이 부처님의 세계요 낱낱 중생과 사물들도 또한 부처님의 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동심으로 온갖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에 따라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 때는 이미 스스로의 마음이 아니라 마음 밖에 또 다른 마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황벽 스님께서는 "착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요 악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마음이 아니니 빈 마음에서 나온 모든 마음은 그대로 법계 부처님의 여의보배인 마음자리에서 뜻대로 나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법성게의 두 번째 게송에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는 본디의 고요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마음을 조주 스님께서는 평상심이라 하셨습니다. 일체 현상이 마음에서 일어났으나 마음은 한 번도 고요한 모습을 잃지 않고 부동으로 있습니다. 움직임 그대로 움직이지 않음이고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온갖 움직임이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중생의 제한된 의意의 작용인 망념으로는 알 수 없으니 부사의不思意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 여의보배를 갖고 뜻대로 부처님의 해인삼매에서 생각을 넘어선 생명들의 장을 풍요롭게 연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 그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을 <법화경>의 '신해품'에서는 궁자窮子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법성게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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