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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가르침은 부처님의 말씀을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적의적절하게 운용한 것입니다. 유식의 근본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 곧 '관계 속의 삶'을 '앎의 관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정된 관계가 아니라 '관계 속의 변화'가 앎으로 나타난 것이며, 나아가 '앎이 곧 삶'이라고 보는 것이 유식의 가르침입니다. 앎은 삶의 진솔한 모습이며 연기이며 열린 세계라는 것입니다.(26)

그래서 진실한 삶을 이야기하고 고정된 틀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인 유가 수행자들의 가르침이 남겨지게 되었는데, 세친보살의 <유식 30송>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친 보살은 함께할 수 밖에 없는 중생에게 삶의 진실을 말함으로써 중생을 이롭고, 자유롭고 , 평화로운 삶으로 이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가 수행자들은 선정과 현실 체험을 통해서 삶의 변화를 보았습니다. 변화의 이면에 변화하지 않는 아와 법이 숨어 있지 않음을 여실히 알았습니다. 삶의 변화란 곧 앎입니다. 드러난 현상[현행]이나 드러나지 않는 흐름[종자]이나, 우리의 삶 자체는 항상 변화의 흐름일 뿐입니다. 유가 수행자들은 이를 통해서 고정된 틀을 가지고 있는 이름의 속성을 파헤치고, 이름으로 만들어진 틀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고정되고 괴롭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정된 틀 속에서 우리가 자기의 소유를 늘리기 위해서 서로 다투는 장면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26)

2.

언어는 감옥이 아닙니다. 언어는 하나의 존재 형식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입니다. '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라는 단순한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다른 공간이, 즉 언어를 넘어서는 [초월하는] 어떤 공간이 - 설령 그곳에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할지라도  - 존재한다고 믿도록 만듭니다. 나는 그렇게 가정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언어를 넘어서 존재하는 어떤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뜻합니다. 정말이지, 그와 비교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세요. '만일 모든 것이 우주의 일부라면, 우리는 도대체 그 우주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까?' 대답은 자명합니다. '내가 가는 곳이 모두 우주이다.' 우리는 분리할 수 없이 더불어 움직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45)

<있음에서 함으로> p47 

마뚜라나  처음에는 분리를 체험합니다. 이러한 체험은 결국엔 연결됨의 통찰로 바뀝니다. 물론 나는 내가 서술하고 있는 대상의 일부가 아닙니다. 여기 탁자 위에 있는 유리잔을 가리키는 경우, 나는 그 유리잔의 일부가 아닙니다. 하지만 유리잔을 구분해 내는 것은 나와 관계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서술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 구분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아무도 이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환경으로부터 특화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는 물질적인 실체 또는 관념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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