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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형용하는 이름으로 나를 삼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일 수 없습니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몸짓이 바로 나입니다. 이것 밖에 다른 나가 있어 생각하고 몸짓을 나타내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업에 매인 생각입니다. 인연을 등지는 생각이며, 등진 거리만큼 '나'와 나의 '것'이라는 허상의 두께를 만듭니다. 그 두께만큼 아픔이 있습니다. 아픔을 이루는 두께를 녹이는 것이 참회입니다. 그러므로 업을 녹이는 참회참회란 몸과 이름을 세우기 위해 했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이름난 것이 나의 것이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이 죽음 앞에 섰을 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듯, 이름 또한 그렇지요.
이름을 좇는 것은 자신을 힘들게 하고 이웃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상으로 채워진 이름 앞에 서지 않는 것이 참회입니다. 나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일을 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드러내려 한다면, 공덕도 잃고 자신을 힘들게만 하며, 이름에 묻혀 사는 꼴이 됩니다. 이름에 머물지 않는 것이 참회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여의 삶을 살아가는 두 번째 방편인 '악업악업을 그치는 것'입니다.
진여의 삶이란 나'의 것도 없고 나의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에도 '나'나 '것'의 자성이 없으니 '나'를 이름나게 하려고 하는 것도 헛된 일이며, '무엇'으로 나를 꾸미려고 하는 일도 부질없는 짓입니다. '나'와 '것' 모두가 본래부터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빈 마음으로 산다면 허물이 있을 수 없겠지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참회이며, 진여가 자신의 온 삶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1
- <대승기신론2> p26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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