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인연으로 다가오는 것을 오는 대로 긍정하고 그것과 기쁘게 공생하는 법을 아는 것을 '지혜'라 하고, 그런 지혜를 가진 이를 '부처'라 한다면 공동체로서의 중생은 모두 부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26)
2.
나 잘못 먹으면 몸을 상하고, 잘못 마시면 죽기도 한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것들에 포함도니 미생물들로 인해 병들기도 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공동체의 경계를 뚜렷하게 하고, 드나드는 것을 관리하는 면역계가 만들어진다. 면역반응의 요체는 내 몸 안에 있는 것과 바깥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고, 나의 생존을 위해 밖에서 들어온 것을 처분하는 것이다. '나'의 안팎을 구획하는 '자아'는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다.
(불교를 철학하다.p127)
3 ......'자아가 강하면 자기를 잡아먹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연으로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달려들고 소유하려 하며, 도망치거나 밀쳐내려 한다. 좋아하는 것을 내 것으로 가지려는 마음(탐심)과 싫어하는 것을 저 멀리 밀쳐내거나 제거하려는 마음(진심)은 외부에 기대면서도 내부를 보호하려는 이런 사태에 기인한다. 생명의 지속에 필요한 것을 넘어서 과하게 가지려 하고, 과하게 밀쳐내려 한다. 그로인해 중생들은 오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치달리고, 갖고 있는 것을 놓치지지 않으려 집착하며, 가버린 것을 붙잡으려 애쓰고, 바로 옆에 있는 것을 피하려 하며, 피할 수 없이 다가온 것을 밀쳐내려 버둥거린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은 부처와 달리 지혜 대신 무명 속에서 산다. 그래서 중생은 부처와 다르게 사는 것이다. 중생이 곧 부처이지만, 중생이 부처가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129)
4.
입이 하는 분별이 공동체인 몸 전체를 망가뜨려 병들게 한다. 생태계도, 지구도 그렇다.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지나치게 퍼다 쓰고 편의만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인간들로 인해 지구라는 공동체는 망가지고 파괴되어 '지속가능성'을 의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리이타가 제공하는 지혜로운 삶의 잠재성은 좋아하는 것을 얻고자 치달리고 싫어하는 것을 내치고자 애쓰는 마음에 가려 무력화된다. 심지어 본성의 어찌할 수 없는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만이 현실과 부합하는 '지혜'인 양 되어버렸다. 덕분에 공동의 삶을 말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은 이념 때문에 현실을 오도하는 몽상이 되거나, 사라진 과거에 대한 안타깝지만 헛된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중생은 원래 공동체적 존재고, 항상-이미 공동체적 존재이건만, 공동의 삶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병들어가는 몸, 망가져가는 지구를 살리려면 입이나 인간의 호오 분별에서 벗어나 몸이나 지구의 고통에 눈을 돌리고, 그것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통찰해야 한다. 좋은 삶을 위해선 지혜가 필요하지만, 선악호오의 분별을 떠날 때에만 지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중생이 바로 부처이건만, 부처가 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부처가 못 되면 부처와 비슷하게라도 살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129)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별2 (0) | 2019.05.13 |
---|---|
분별1 (0) | 2019.05.13 |
차이의 정치학: 대승의 정치학 (0) | 2019.05.09 |
무상명심 (0) | 2019.05.09 |
무지: 근본적 무지 (0) | 2019.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