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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컨대 분별이란 호오와 애증의 선판단이 함께 작동하는 판단이고, 그렇기에 호오와 애증의 감정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이다. 그래서 승찬 스님은 앞서 인용한 <심신명>의 문장 바로 다음에 이렇게 썼던 것이다. "오직 애증을 떠난다면 사태의 실상이 통연명백하다. <135>
2.
분별이란 바로 이런 탐심과 진심의 작용이라는 것 또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143>
3.
따라서 팔정도의 첫 번째에 나오는 '정견'이란, 옳은 견해를 세우는 게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견해를 내려놓는 것이다. '정사유'또한 '옳은' 것을 사유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호오미추의 척도를 내려놓고 애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저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들리고 그가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애증을 떠나면 모든 게 통연명백해진다." 사태가 통연명백할 때 비로소 지혜가 발동한다. 분별을 떠났을 때 비로서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다. [혹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다.]<144>
4.
'상식'이나 '양식'은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분별의 기준이다. "재산에 대한 처분권이야 소유자에게 있지"라는 상식이나 "결혼은 남녀가 하는 거지"하는 식의 양식이 그러하다. "부처란 이런 것이고, 중생은 이런 것이다"라는 양식 또한 그렇다. <145>
상식 이하의 일들이 흔히 벌어지는 곳에서는 상식을 회복하고 양식에 따라 살자는 호소가 자주 등장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양식과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집단적인 분별에 의해, 그런 분별의 기준에서 벗어난 다른 생각이나 감각, 행동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그럼녀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재난'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분별간택을 경계하는 선사들의 말이 산속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간의 거리에서 더욱더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