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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치 우리가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어떻게든 실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의 진술들이나 설명들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렇지만 우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우리는 실수들을 통해 배운다고 말하면서도, 실수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타자들 -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예건대 정치가들, 어린이들, 과학자들, 부모들, 철학자들 - 을 맹비난한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우리는 실수를 우리의 행위에서의 심각한 실패로 간주한다. 이 실패가, 우리가 그렇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볼 수밖에 없는 실재 앞에서의 범죄적 맹목성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만일 실수가 저질러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자문해 본다면, 우리가 실수가 하나의 행위임을, 즉 어떤 행위가 이루어진 순간에, 그리고 그 타당성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또 다른 행위와 관련해서 나중에 실수로 평가 절하되는 순간에 그것의 타당성을 정직하게 수용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의 행위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면 실수는 실수 그 자체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며, 실재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실수는 그것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순간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실수는 나중에 우리가 연속적이 계기를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들을 비교할 때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를 때에는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알지 못한다. 실수는 현재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실수는 나중에 일어난다. 만일 우리가 하고 있던 어떤 것이 그것을 하는 순간에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실수는 잘못이 아니다. 실수는 우리가 갖고 있는 역량의 실패도 아니다. 실수는 우리의 한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실수는 우리의 '함들'의 과정에 대한 성찰로서 발생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하는' 순간에, 우리가 나중에 그와 같은 '함'을 (또한 우리가 또 다른 '함'을 하나의 실수로 간주하게 될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것과 관련하여) 실수로 간주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독립적인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내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아니면 사태가 어떠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만일 내가 나중에 그러한 주장이 실수였다고 생각하게 될지를 모른다면 말이다. 왜 누군가 실수를 저지른 것에 대해 비난받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실수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실수가 나중에 실수라고 불리게 될 행위가 이루어진 뒤에 발생하고, 성찰이라는 사후적 행동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나는'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우리가 하는 것'을 '하는' 그 순간에는, 그것을 나중에 실수라고 부르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 받아들여지고 나서야 대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함으로 17)

T.
실수가 사후에 실수로 성찰된다는 점, 우리가 하는 것을 하는 순간에는 실수인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새옹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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