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지 않는 편안함.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됨] 그 근본에는 존재론이 스며져 있다. 미시파시즘. "저를 어떻게든 특정한 범주에 넣으려는 당신의 시도와 당신이 사용하는 그러한 인식론적 어휘들은 나 자신을 상당히 불행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게 보여준 그런 입장에서는 존재론이라는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끔찍한 사고방식에 다시 들어가게 하는 뒷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을 따를 경우 우리는 또다시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외부세계와 주어진 것에 기댐으로써 각자의 책임이라는 것이 제거됩니다. 이 점이 존재론의 아주 끔찍한 모습입니다."(발명품 36)
가령 주사위를 들고서 모서리와 평면을 관찰해 보세요. 주사위라는 상수(변하지 않는 모습)를 산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대답은 '움직임(운동)과 그 때 생겨나는 관점에 따른 시야의 변화를 통해서' 입니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임으로써, 손으로 주사위를 돌림으로써 운동근육의 활동과 감각적 활동 간의 새로운 연관성이 생겨나고 그때 신경체계는 변하지 않는 것을 산출해내게 되는 겁니다. 중요한 점인데 이때 신경체제가 뭔가를 산출해내는 과정에서 어떤 능력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 주사위와 같은 어떤 대상에 붙인 이름은 근본적으로 보면 우리 신경체계의 능력이고 이 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변하지 않는 뭔가를 산출해낼 수 있습니다. 대상과 우리가 습관적으로 객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자세히 보면 변하지 ..
윤회 속의 자유자재. 공중돌기 자기의식, 자기욕망 욕망의 순환성, 욕망의 윤회
실체는 없는데 작용은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오직 변이 뿐
이런 종류의 실험들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이것들은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구조와 뗄 수 없게 얽여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세계의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를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색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색채공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한 세계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문제는 우리의 생물학적, 사회적 행위의 역사와 떼놓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뚜렷하고 당연해서 오히려 깨닫기가 매우 어렵다. (앎의 나무 30) 2. 색즉시공 "사람들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음탕한 마음을 본다." - 마를린..
밖에서 보는 사람은 왜 저걸 못 고칠까 싶지만 그 사람은 그 순간에는 생각이 그렇게 일어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것을 불교 용어로 '업'이라고 합니다. 업은 원래 불교 용어가 아니라 인도에서 예부터 쓰던 전통 용어입니다. 불교만의 용어로 하면 오온 중 '행', '상카라'가 여기에 가깝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습관 또는 무의식이지요. 거기에서 마음이 일어나서 행동이 따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나름대로 잘한다고 한 행동의 결과가 대개는 원치 않는 쪽으로 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괴롭지요. 그러나 지금 이렇게 살게 된 것은 모두 우리가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입니다. (지금 여기 211) 2. 신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구조적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