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의 모습이 공성을 그 바탕으로 한다고 할 때는 이법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모든 삶의 모습이 드러남 그대로 긍정되는 세계를 사법계라고 합니다. 이 두 법계의 관계는 공성 그대로가 모든 사물에 드러나 있어서 아무 걸림 없이 한 세계를 이루니 이를 이사무애법계라고 합니다. 또한 모든 삶들은 제 스스로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살게 하는 관계로 서로 포섭되고 있으면서, 제 모습 그대로 포섭된 모두를 나투고 있으니, 이를 사사무애법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법성게 111)
수행을 하다 보면 삼매를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삼매란 자아의식이 사라진 상태이며 이를 통해서 무아, 무상의 진여공성을 밝게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깨달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무아, 무상을 체득한 삼매가 깨어 있을 때뿐만 아니라 꿈속에서나 깊은 잠 속에서도 계속된다면 깨달음을 성취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 속'이란 겉에서 보면 잠이 든 것 같으나 그 상태에서도 선정 삼매가 계속되어 업의 씨앗[종자]이 완전히 없어진 경지를 말합니다. 이 때가 되면 깨어 있음과 잠들어 있음이 아무런 차이가 없으니 모두 열반적정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반적정은 현행인 드러난 번뇌와 씨앗인 숨어 있는 번뇌가 다 사라진 고요함입니다. 그러나 대개 삼매 체험에서는 무아의 흐름을 맛보다가도 삼매에서 깨어나서는 다시 번뇌망상이..
우리가 이와 같은 자기 없음의 연기법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세계입니다. 눈을 감고 떠돌리면 나타나는 생각, 꿈, 선 수행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들이 좋은 예입니다. 생각이나 꿈, 선 체험 등이 반드시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으로 나누어져 나타나는 듯하지만 마음 밖에 따로 대상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의 한 세계일 뿐, 삼매 체험에서 보면 지금 분명히 마음 밖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모든 대상들이 마음의 한 세계임을 여실히 알게 됩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인식 주관이 아닌, 주객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하나된 장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없음의 삼매야말로 삶을 여실히 아는 것이며, 해탈의 바탕이 됩니다. (법성게 83)
부처님을 빼 놓은 다른 이들의 가르침은 대체로 존재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상주론과 인과의 이치를 부정하는 단멸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만 이 사유의 배경은 결정론입니다. 곧 결정된 사유의 틀에 따라 모든 중생의 삶이 연역되는 것이나, 이는 실존의 우리 모습이 아닙니다. 결정된 사유의 틀에 따라 오늘날까지도 사회의 질곡이 더욱 가중되고 있는 현실에서 인도의 카스트는 대표적인 보기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상주론과 단멸론의 가르침이 한 편에 치우친 것이라 하시면서 연기중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비우고, 곧 몯느 생각의 틀을 버리고 우리의 삶을 지켜보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도 이와 같은 결정된 생각의 틀에 매여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마음을 비우고 실존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곧 명사인 무엇의 생멸이 아니라 동사인 생멸의 쉼없는 무엇 되기가 진여,공의 끊임없는 자기 변화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그대로 진여,공의 표현인 것에서의 생멸입니다. 이를 에서는 색 그대로 공이며 공 그대로 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고정된 대상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바꿔말하면 인식이 대상을 고정하면서 실체를 만들기 때문에 생멸 그대로 불생불멸인 진여를 잃고 생상相(생의 명사화)과 멸상(멸의 명사화)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진여인 무상의 흐름이 시공의 제한적 인식으로 업화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결정된 상相, 곧 자성을 갖게 됩니다. 자성을 갖게 되면서 마음이 닫히게 되고 번뇌가 뿌리를 내립니다. 여기에서 생도 없고 멸도 없는 시간 밖의 영원성만을 세우게 되고 현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