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이 아무런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이 셋의 본바탕이 진여공성인 데서 하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중생은 스스로가 진여공성인 줄을 알지 못한 상태고 부처님은 진여공성을 구현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면목이란 늘 말씀드렸듯이 연기 관계에서 하나된 온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법성게 202)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존재는 관계의 그물망으로 하나되어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독립된 실체로서의 개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관계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계 그 자체는 나눌 수 없지만 개체란, 관계 안에서 더욱 찬연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체를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203)
화엄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착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악한 마음이 일어나면 또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십시오. 그때는 착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요 악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이때 선악의 선별이 사라지고 빈 마음의 법계 부처님이 온갖 마음으로 나툰 것이니 마음 마음이 부처님의 세계요 낱낱 중생과 사물들도 또한 부처님의 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동심으로 온갖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에 따라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 때는 이미 스스로의 마음이 아니라 마음 밖에 또 다른 마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황벽 스님께서는 "착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요 악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마음이 아니니 빈..
1. 생사에서 벗어나 생사 밖에 있는 해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모습을 여실히 아는 여실지견에 따라서 생사가 괴로움의 세계가 아님을 알게 되고, 아울로 모든 불만족이 그 자체로서 불만족을 낳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집착에 의해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2. 생노병사등 4고8고는 그 자체로서는 괴로움이 아닙니다. 괴로움의 뿌리는 집集, 곧 자아의식으로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자아의 허상을 유有나 무無 등으로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그 자체로서 결정된 것이 없고 인연조건에 의한 나툼에 지나지 않은 것을 알게 될 때 공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3. 그래서 에서는 깊은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 곧 집착이 단지 업에 의한 허상임을 여실히 알고 연기세계로서 낱낱을 나투는 공에 대한 체득을 이룰 때,..
놓으십시오. 놓는 순간 그때가지 스스로를 옭아매는 모든 것들이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있어 우리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업이라고 합니다. 어느 누구든 설사 신통자재하신 부처님까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만은 속일 수 없으니, 이 속일 수 없이 훤히 알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의 업이고 이것에 의해 끊임없이 속고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지요. 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업의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보십시오. 마음이 주인입니다만 마음 또한 제멋대로 될 수 없습니다. 마음도 제 모습을 결정하여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그와 같이 있다가 사라져 갈 뿐, 습관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진실한 마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큰사람이란 크다 작다로 서로 견주는 가운데서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대승大承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대승의 뜻을 원효 스님께서는 첫머리에서 "낱낱의 모습으로 나투면서도 고요하고, 우주에 가득 찼으면서도 텅 비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화엄연기의 일법계가 바로 대승의 세계이며 이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게송 앞까지 말한 하엄의 가르침이 부처님과 보살과 큰사람의 경계라고 합니다. [십불보현대인경]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 생각을 이어서 알아차려야 할 것은 부처님과 보살이 모든 중생 밖에 있는 어떤 위대한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자비를 행하는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엄의 상즉상입의 세계는 불보살의 경계일 뿐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