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선생님이 얘기하고 있는 것이 가져오는 직접적인 결과는, 외부 세계와 인식하는 주체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상황은 빙글빙글 순환하며 도는 군요.
이것이 결정적인 점입니다. 내 연구의 대상, 그와 동시에, 불가피하게, 내 연구의 수단은 관찰자입니다. 실로 우리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나누는 전통적인 분리를 대체하는 순환적인 상황 속에 얽혀 있습니다. 나는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나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아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를 내 사고의 출발점으로서 이용합니다. 어떠한 존재론적 전제도 두지 않은 채 말입니다. 단지 관련된 질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서 그렇게 할 뿐입니다. 어떠한 고차원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어떠한 존재론적 토대도 없습니다. 어떠한 보편타당한 정당화도 없습니다. 관찰자는 관찰하며, 무엇을 보며, 그것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합니다. 관찰자는 자신이 '하는' 것을 '합니다.' 그에게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념의 문제이지 확실한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함으로 43)
'마뚜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타 관찰자 : 관찰의 순환성 (0) | 2020.03.02 |
---|---|
유아론이 아니다: 마뚜라나 (0) | 2020.03.02 |
몸의 철학 (0) | 2020.03.01 |
초월적 실재의 형이상학2 (0) | 2020.03.01 |
초월적 실재의 형이상학 (0) | 2020.03.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