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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인간의 예속 또는 감정의 힘에 대하여 서론 편집글

 

서론

 

1.

감정을 제어하고 억제함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감정에 종속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운명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종종 강제될 정도로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T1000.0 : <금강경>의 유명한 구절, "마땅히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를 떠올려보자. 감정에 예속되는 즉 감정에 머물지 말고,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종종 강제될 정도로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마땅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不應住色生心), 마땅히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말 것이요(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마땅히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 以生其心).<금강경>]

 

2.

이 4부에서, 나는 이것의 원인을 증명하고 감정들 중에 어떤 것이 선이고 또 어떤 것이 악인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완전성과 불완전성 및 선과 악에 관하여 약간의 설명을 하고자 한다.

 

3.

어떤 것을 만들려고 결심하고 그것을 완성한 사람은 그것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제작자 자신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정신과 목적을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 또는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떤 작품(나는 그것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을 보고, 그 제작자의 목적이 집을 짓는 것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그 집이 완성되지 않았다[불완전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아직 한 번도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없는 어떤 작품을 본다면, 그리고 그것을 제작한 사람의 정신도 알지 못한다면, 그는 물론 그 작품이 완성되었는지 완성되지 않았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완전 및 불완전이라는 말의 최초의 의미였던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이 일반적 관념들을 형성하여 집, 건물, 탑 등의 형(形)을 안출하고, 사물의 어떤 형을 다른 형보다는 선호하기 시작한 이후에, 각자는 같은 종류의 사물에 대하여 형성해 놓은 일반적 관념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완전하다고 하고, 자신이 파악해 놓은 형과 별로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설령 제작자의 의견으로는 그것이 충분히 완성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불완전하다고 하게 되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자연물에 대해서조차 사람들이 보통 완전하다거나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에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공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연물에 대해서도 일반적 관념을 형상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적 관념을 사물의 형(形)으로 간주하며, 또 자연(자연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면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이 그 관념에 주의하고 형(形)으로서 자기 앞에 놓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은 같은 종류의 것에 대하여 파악해 놓은 형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자연에서 발생한 것을 볼 때에, 자연 자체가 실패했거나 실수를 범하여 그 사물을 불완전하게 남겨 놓았다고 믿는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에 의해서보다는 오히려 편견에 의해서 자연물을 완전하다거나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1부의 부록에서 자연은 목적을 위해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 또는 자연이라고 부르는 저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동일한 필연성에 의해 작용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이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본성의 필연성에 의하여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제1부 정리 16). 그러므로 신 또는 자연이 왜 작용하는가에 대한 이유 또는 원인과, 왜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이유 또는 원인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신은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존재함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작용함에 있어서도 아무런 원칙이나 목적을 갖지 않는다. 목적원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충동이 어떤 사물의 원칙 또는 제1원인으로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 인간의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거주가 이 또는 저 가옥의 목적원인이었다고 우리가 말할 때, 확실히 우리는 인간이 옥내생활의 이점을 표상함으로 인하여 가옥을 건축하려는 충동을 가졌다고 이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거주는, 그것이 목적원인으로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 이러한 특정한 충동에 지나지 않고, 이 충동은 실제로 작용원인이며, 제1원인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통 자기의 충동의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전에 종종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의 행동과 충동을 의식하고 있지만, 자신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원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때때로 실패하거나 실수를 저지르며, 불완전한 사물을 산출한다고 하는 일반 대중의 의견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이것을 제1부의 부록에서 다루었던 허구들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T1000.0 : 핵심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는 욕망은 자신이 지은 인연에 따라 형성되어진 것으로, 단 지은 인연의 질서를, 지은 바 인연을, 그 원인을 모른다. 때문에 욕망을 의식한다고 해서 욕망이 행동의 제1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이다. 자신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원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모르지만 욕망을 의식할때 욕망을 하나의 결과로서 지켜볼 수 있다. 지켜본다는 것은 감정 또는 욕망에 예속되지 않는 것인데, 원인을 모른다는 맥락에서 욕망은 흐름이며 이 흐름을 절단할 것인지 이을 것인지는 일어난 욕망에 원인을 두지 않고 현재 마주한 인연에 근거함으로써 욕망의 예속에서 벗어난다. 즉 마땅히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것이다.      

 

6.

그러므로 완전과 불완전은 실제로 사유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는 동일한 종(種)또는 유(類)에 속하는 개체를 서로 비교함으로써 보통으로 지어내는 개념일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앞에서 (제2부 정의 6) 실재성과 완전성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에 있는 모든 개체를 가장 보편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하나의 유(類)에, 말하자면 자연에 있는 모든 개체에 예외 없이 관계하는 유(類)의 개념에 귀속시키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에 있는 모든 개체를 이 유(類)에 귀속시켜 서로 비교하고, 또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많은 유성(有性)이나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도 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한계, 종말, 무능력 등과 같은 부정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인정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들을 불완전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우리가 완전하다고 하는 것들만큼 우리의 정신을 감동시키지 않기 때문이며, 본래 그것들에 속하는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자연이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물의 본성에는 작용원인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기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속하지 않으며, 작용원인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기는 것은 모두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T1000.0 : 실재성과 완전성이 동일하다는 정의를 통해 떠올려볼 것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모든 것은 공空하다.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란 말이 실재성과 완전성을 드러내고 있다.  

7.

선과 악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것들도 역시 우리가 사물을 그 자체로 고찰하는 한, 사물에 있어서의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나타내지 않으며, 사유의 양태 또는 우리가 사물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형성하는 개념일 뿐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으며, 선과 악에 무관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기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나 사정이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말들을 보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본성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의 관념을 형성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들을 앞에서 언급한 의미 속에서 보존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에서, 선이란 우리가 우리 앞에 설정해 놓은 인간 본성의 전형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또 악이란 우리가 그 전형처럼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임을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인간이 이 전형에 더 가까이 또는 덜 가까이 다가가는 한에 있어서 그 인간을 더 완전하다거나 더 불완전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 보다 작은 완전성에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한다거나, 보다 큰 완전성에서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가 하나의 본질 또는 형상에서 다른 본질 또는 형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말이 사람으로 변한다면, 그것이 곤충으로 변하는 경우처럼 말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의 활동능력이, 그의 본성에 의하여 이해되는 한에 있어서, 증대하거나 감소한다고 생각한다.

 

8.

마지막으로, 나는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일반적으로 완전성을 실재성으로 이해할 것이다. 즉 완전성을 각각의 사물이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한에 있어서 그 사물의 본질로 이해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물의 지속을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개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보다 오랜 시간 동안 존재를 지속했다는 이유로 보다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사물의 지속은 그것의 본질에 의하여 결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의 본질은 일정하고 결정적인 존재의 시간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사물은 더 완전하든 덜 완전하든, 그것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과 동일한 힘을 가지고 언제나 존재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점에서는 모든 것이 동등하다.

 

T1000.0 : 더 완전하든 덜 완전하든이란 사물의 변용된 모습에 따른 이름과 모양으로 이 서론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완전하거나 불완전하거나를 뜻하지 않는다. 분별일 뿐이다. 분별이 있을 뿐 모든 것은 동등하다. 무등등無等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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