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선지식이여, 내게 무상송이 하나 있으니 각각 외워 가지도록 하라. 세속에 있는 사람이나 출가한 사람이나 모두 이대로 닦을 것이니 만약 스스로 닦지 않고 오직 나의 말만 기억한다면 아무 이득이 없을 것이다. 나의 게송을 잘 들으라.
말로 통하고 마음이 통함이여
해가 허공에 있음과 같으니
오직 견성하는 법을 전하여 삿된 가르침을 쳐부수리.
법에는 빠름과 늦음이 없지만 어리석고 깨달음이 빠르고 더딜 뿐.
다만 이 견성하는 문을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못하여
만 가지로 셜명하지만
이치는 모두 하나로 돌아가네.
번뇌로 가득차 어두운 방에
항상 지혜의 빛을 밝히라.
삿됨이 오면 번뇌가 일고
올바름이 오면 사라지리니
삿됨과 올바름을 쓰지 않으면
청정하여 무여에 이르리.
깨달음의 성품 가운데
마음을 일으키면 곧 망녕.
청정한 마음 망녕에 있기 때문이라.
바르게 하면 세 장애 없으리.
만약 사람이 도를 닦으면
모든 것 다 방해되지 않고
항상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보면
도와 더불어 서로 맞는 것을.
모든 것은 저마다 길이 있고
서로 방해하여 괴롭히지 않으며
도를 떠나 따로 찾으면
몸이 다 하도록 보지 못하네
한평생 허송세월 하다가
닥칠 때 뒤늦게 뉘우치나니
참다운 도를 보고자 하는가.
바른 것 행함이 이 도이니라.
만약 스스로 도심이 없다하면
어두운 행이라 끝내 도를 못보리라.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잘못을 보지 말라.
만약 남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허물이 오히려 그것이니
남만 그르고 나는 그르지 않다면
그르다는 그것이 허물이리라.
다만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없애고
번외의 뿌리를 뽑아 없애어
밉고 고움에 마움을 두지 않으면
다리 펴고 길이 쉬리라.
다른 사람을 교화하려면
마땅히 방편을 쓰라.
자기 스스로 의심을 없애야
자성이 나타나리라.
불법이란 세간에 있으며
세간을 떠나지 않는 깨달음일세.
세간을 떠나서 깨달음을 구함은
토끼뿔 구함과 같네.
바른 소견은 세간을 떠난 것이요
삿된 소견은 세간이니
삿된과 올바름을 다 없애면 보리의 자성이 완연하리라.
이 게송이 바로 톤교이며 이름하여 대법선이니
어리석은채 들으면 몇 겁을 지내고
깨닫기로 말하면 일순간일세.
불교는, 대상을 본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보는 것이라하는데, "남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허물이 오히려 그것이니" 때문일터.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안다는 말처럼, 남의 허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나에게도 그 허물이 있어야 보이기 때문. 내 마음 속에 그러한 허물이 없다면 나는 볼 수가 없다. 보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예수가 "죄없는 자부터 돌을 던져라"라고 했을때 사람들이 하나 둘 돌을 놓고 돌아간 것도 이와 같은 이야기.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내 마음을 보는 것, 그러니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며 하나일 때만이 비로소 보인다. 본다는 것은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보는 것. 반야심경에서 '본다는 것이 없다[無眼耳鼻舌身意]'는 것은 이런 이치가 아닌가.
'혜능의 <육조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無我 (0) | 2012.09.12 |
---|---|
항상 즐거운 것[至福] (0) | 2012.09.11 |
육조단경의 게송2 (0) | 2012.09.11 |
無相에 대하여 (0) | 2012.09.10 |
무심의 공덕 (0) | 2012.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