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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고찰들이 이해하기에 특별히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기에 특별히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렇게 새로운 개념들을 매우 많이 창안해 냈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엄밀하게 규정된 의미를 가지고 개념들을 사용하고 은유를 피하기 위해- 은유들은 내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막거나 심지어 방해하기도 하기 때문에 - 엄청나게 노력했습니다. 말하자면, 이해가능성의 문제는, 내 견해로는, 실제로 수용가능성의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과 듣거나 읽고 싶지 않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희망하면서 물음들을 던집니다. 자기들이 들었던 것이, 그리고 실제로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 것이 결국엔 그들이 이해한, 그리고 어떤 이유로 거부했던 것과 다른 것으로 반복해서 판명이 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

 

선생님은 비관습적인 은유들, 우화들,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제거하면서, 확실히 추상적인 문체로 글을 씁니다. 그렇지만 추상은 관찰자가 보이지 않게 만드는 데 기여하지 않나요? 추상은 특별한 체험으로부터 하나의 테제를 분리시킵니다. 설령 그 테제가 체험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나는 내 글쓰기에 추상들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의 정합성들로부터 유래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파악될 수 있으며, 더 많이 알고자 하는 독자들을 자극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야기들, 은유들,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것은 내게는 전혀 의미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관찰자 움베르또 마뚜라나와 그의 개인적 체험들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왜냐하면 우리가 특별한 관찰자의 작동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기 일반의 작동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통찰은 관찰자들이 그들이 구분의 작동들을 통해 그들이 지각하는 것을 상술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은유들 역시 사용하지 않습니다. 은유들은 영역들을 뒤섞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이해하기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들은 이해에 손상을 가합니다. 나는 은유들이 우리를 미혹시킨다고 생각합니다.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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