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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어떤 지적 체험들이 어떻게 선생님의 인식론적 견해들을 완전히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만일 신경체계가 전적으로 그 자신의 내적 법칙들에 따라 작동하는 폐쇄적인 네트워크로 간주된다면, 물음은 이제 우리가 어떻게 인지 과정들을 이해하고 서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지란 무엇인가요?

인지는 특정 영역에서의 적절한 행위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설명도 아니고, 환경의 조건들에 따라 계산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동물이나 인간이 적절하게 행동하고 그 상황과 긴밀히 연관될 때, 그리고 관찰자들이 그들이 관찰하는 상황에 적절한 행위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 이 관찰자들은 예의 그 동물과 인간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이 인지를 드러낸다고 말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식은 특정 영역에서의 (관찰자들에 의해 적절하다고 판단된) 행위입니다.

인지적 과정들의 순환성에 대한 선생님의 서술은, 선생님의 이론의 전체 구조물을 비추는 인지와 지식의 순환적인 정의에 도달합니다. 인지는 관찰자들에 의해 이해되고 확립됩니다. 지식은 객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관찰자에 의존하는' 생산물로서 나타납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바로 관찰자들이 행위의 적절함을 규명하는 방식으로 유기체들과 환경들의 상호작용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바로 관찰자들이 관찰된 체계들의 행동의 적절성과 적합성을 근거로 하여, 그 체계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행동들이 인지적 작용을 함축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의 유지는 지식의 표현입니다. 존재 영역에서의 적절한 행위의 표명입니다. 아포리즘의 형태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들의 삶 속에서, 삶은 앎을 수반하고, 앎은 삶을 수반한다.' (함으로 107)

T.

특정영역에서의 적정한 행위라 함은 내게는 정해진 바가 없는 무유정법을 떠올리게 한다. 정해진 바 없이 인연을 따라 행하는 것을 나는 중도의 길로 이해해왔다. 내 생각을 밀고 나간다면 삶이 곧 앎이다. 삶이 곧 중도다.

"이 수행의 발견을 중도라고 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중도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합니다. 즉 '정함 있음이 없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다'라고 고집할 만한 진리가 이 세상에 없듯이 '정해진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도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면 최선의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위치가 바뀌면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방법도 변해야 합니다. 자기 위치가 바뀌었는데도 기존의 방법에 매달리는 것이 극단으로 빠지는 것이며, 그 새로운 조건에 대응해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이 창조이고 중도입니다. 고타마는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수행의 치고의 길은 바로 중도, 즉 정해진 길이 아니라 '정함 있음이 없는법[무유정법]'인 것입니다. (붓다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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