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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념, 심상,언어의 혼동
1) 나는 제1의 점에서부터 시작하여, 독자 여러분에게 관념 또는 정신의 개념과, 우리가 표상하는 사물의 심상을 정확히 구별할 것을 촉구한다.
2) 그 다음에는 관념과 우리가 사물을 표현하는 데 쓰는 언어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즉 심상, 언어, 관념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혼동되고 있거나, 아니면 충분히 정확하게 구별되고 있지 않거나, 혹은 충분히 주의깊게 구별되고 있지 않음으로 인하여, 의지에 관한 이 이론이 사색을 위해서도 현명한 삶의 방식을 수립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1.1 혼동에 대한 설명.
진실로 관념이라는 것을 외부 물체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우리 안에 형성되는 심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뇌에 아무런 흔적도 남길 수 없는 사물 또는> 사물들 중에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우리의 뇌에 아무런 유사한 심상도 형성할 수 없는 사물의 관념은 관념이 아니고 단지 우리가 제멋대로의 의지에 의하여 지어내는 상상물에 불과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관념을 화판위에 그림과 같이 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편견에 사로잡혀, 관념이 관념인 한에 있어서 긍정 또는 부정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또, 언어를 관념 또는 관념이 포함하는 긍정과 혼동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어떤 것을 단지 말로써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 자신들은 스스로 감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의지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장의 개념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 사유의 본성에 주의하는 사람은 그러한 편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그 다음에 그는 관념이 (관념은 사유의 양태이므로) 사물의 심상에도, 언어에도 있지 않음을 아주 분명하게 이해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와 심상의 본질은 사유의 개념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 신체의 운동으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2.
반론들1. 사람들이 의지는 지성보다 더 광범하게 확대되므로 지성과는 다르다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의지가 지성보다 더 광범하게 확대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에 의하면, 우리가 지각하고 있지 않은 무한히 많은 다른 것들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동의능력 또는 긍정이나 부정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나, 보다 더 큰 인식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의지는 무한하고 지성은 유한하다는 점에서 의지는 지성과 구별된다.
답변. 만일 그들이 지성을 뚜렷하고도 명확한 관념으로만 해석한다면, 의지가 지성보다 더 광범하게 확대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의지가 지각 또는 사유능력보다 더 광범위하게 확대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나는 어찌하여 의지하는 능력이 감각하는 능력 이상으로 무한하다고 일컬어지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한히 많은 것을 (그렇지만 하나씩 차례대로, 왜냐하면 우리는 무한히 많은 것을 동시에 긍정할 수는 없으므로) 동일한 의지능력으로 긍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무한히 많은 물체를 (즉 하나씩 차례대로) 동일한 감각능력으로 감각하거나 지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론) 만일 그들이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무한히 많은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답변) 나는 그러한 것은 어떠한 사유에 의해서도, 따라서 어떠한 의지능력에 의해서도 파악될 수 없다고 대답한다.
반론)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신이, 우리가 그런 것들도 또한 지각하기를 원했다면, 신은 우리에게 보다 큰 지각능력을 부여했어야 하지만, 이미 우리에게 부여한 것보다 더 큰 의지능력을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답변) 이 말은 마치 그들이 '만일 신이, 우리가 무한히 많은 다른 실재들을 인식하기 원한다면, 우리가 그 무한히 많은 실재들을 파악하도록 우리에게 보다 큰 지성을 부여할 필요는 있었지만, 실재에 대한 보다 더 일반적인 관념을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밝힌 것과 같이 의지는 어떤 일반적인 유(有)이거나, 혹은 우리가 모든 개개의 의지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관념, 즉 모든 개개의 의지작용에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든 의지작용에 공통적이거나 일반적인 이 관념을 능력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 능력이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 무한에까지 확대된다고 그들이 말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것은 하나의 개체에도, 많은 개체에도, 무한히 많은 개체에도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반론들 2. 우리가 스스로 지각하고 있는 사물에 동의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판단을 보류할 수 있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가장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어떤 것을 지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다고 이야기 되지 않고, 단지 그가 그것에 동의하거나 반대한다는 한에 있어서만 그렇게 이야기 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날개 달린 말을 상상한다고해서 날개 달린 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는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험은 의지, 즉 동의능력이 자유로우며 인식능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극히 명백하게 가르쳐주는 것으로 보인다.
답변. 두 번째 반론에 대해서 나는 판단을 보류하는 자유로운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대답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판단을 보류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그가 사물을 타당하게 지각하고 있는 않은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판단의 보류는 실제로는 자유의지가 아니라 지각이다.
이것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개 달린 말을 표상하면서 다른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는 어린이를 생각해보자. 이 표상은 말의 존재를 포함하며 (정리 17의 계에 의해), 어린이는 말의 존재를 배제하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지각하지 않으므로, 그는 필연적으로 그 말을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비록 그 말의 존재를 확실히 알지 못할지라도, 그것의 존재를 의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우리는 꿈속에서 아주 흔하게 경험한다. 꿈꾸는 동안 자신이 꿈꾸고 있는 사물에 관하여 판단을 보류하거나, 자신이 꿈꾸면서 보고 있는 사물을 꿈꾸지 않도록 하는 자유로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만 꿈속에서조자 우리가 판단을 보류하는 일이 일어난다, 즉 우리가 자신이 꿈꾸고 있는 것을 꿈꾸는 경우에.
다음으로, 나는 누구라도 지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즉 정신의 표상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오류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정리 17의 주석 참조). 그러나 나는 인간이 지각하는 한에 있어서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날개 달린 말을 지각한다는 것은 말이 날개를 가졌음을 긍정하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는다면, 정신은 그 말을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며, 또한 그것의 존재를 의심할 아무런 원인도, 그것에 대해 동의를 거부할 아무런 능력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날개 달린 말의 표상이 그와 같은 말의 존재를 배제하는 관념과 결합해 있거나, 또는 정신이 자기가 갖고 있는 날개 달린 말의 관념이 타당하지 않음을 지각하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 정신은 그 말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부정하거나, 아니면 그 말에 대해 필연적으로 의심할 것이다.
반론들 3. 하나의 긍정이 다른 긍정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즉 참된 것을 참이라고 긍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릇된 것을 참이라고 긍정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관념에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보다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완전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한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보다 더 우수함에 따라서, 어떤 대상의 관념도 마찬가지로 다른 대상의 관념보다 더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의지와 지성의 차이를 명백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답변. 이로서 나는 세번째 반론에도 대답했다고 생각한다. 즉 의지는 모든 관념에 대해 적용되는 어떤 일반적인 것, 단지 모든 관념에 공통적인 것, 즉 긍정만을 표시하는 어떤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가 이처럼 추상적으로 파악되는 한에 있어서, 의지의 타당한 본질은 모든 개개의 관념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되며, 이 점에서만 모든 관념에 있어서 동일하다. 그러나 의지가 관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고찰되는 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점에서 개개의 긍정은 관념 자체와마찬가지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원의 관념이 포함하는 긍정과 삼각형의 관념이 서로 다른 것과 똑같다.
나는 또, 우리가 참된 것을 참이라고 긍정하기 위해서, 그릇된 것을 참이라고 긍정하는 것과 똑같은 사유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두 긍정은, 그 정신을 고찰하면, 유(有)와 비유(非有)의 관계처럼 서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관념 안에는 허위의 형상을 구성하는 그 어떤 적극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정리 35와 주석, 정리 47의 주석을 참조). 그러므로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혼동하고, 이성적인 유(有)와 추상적인 유(有)를 실재적인 유(有)와 혼동할 때, 우리가 얼마나 쉽사리 그릇된 생각을 품게 되는지를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
반론들 4. 만일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하여 행동하는 게 아니라면, 사람이 브리당의 당나귀처럼 평형상태에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인해 죽을 것인가? 만일 내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나는 인간이 아닌 당나귀나 인간의 조상(彫象)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것을 부정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결정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된다.
답변. 그와 같은 평행상태에 놓인 인간(즉,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떨어져 있는 음식과 음료 이외에는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는 사람)은 기아와 갈증 때문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전적으로 인정한다. 만일 그들이 그러한 인간은 인간으로서보다는 오히려 당나귀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스스로를 목매는 사람을 무엇으로 생각할 것인지, 또 어린애, 바보, 미치광이를 무엇으로 생각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모른다고 대답한다.
3. 의지에 대한 바른 이해에 어떤 이익이 있는가?
1. 이 이론은 우리가 신의 명령에 의해서만 행동하며, 신의 본성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보다 더 완전하고 우리가 신을 보다 많이 인식함에 따라서 더욱더 그러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평정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으 신에 대한 인식에만 있으며, 이 인식에 의해서 우리는 사랑과 도의심이 권고하는 것들만을 행하도록 인도된다. 이것으로부터 덕 그 자체와 신에 대한 봉사가 행복 그 자체이자 최고의 자유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가장 비천한 굴종에 대해서처럼 덕과 선행에 대해서도 신으로부터 최대로 보상받아 영광스러워지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덕에 대한 참다운 평가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우리는 명확히 이해한다.
2. 이 이론은 운명에 관해서, 또는 우리의 능력 안에 없는 것들에 관해서, 즉 우리의 본성에서 생기지 않는 것들에 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즉, 우리는 운명의 양면을 태연한 자세로 기다리고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삼각형의 본질에서 세 각의 합이 2직각과 같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과 똑같은 필연성을 가지고 모든 것은 신의 영원한 섭리에서 생겨 나오기 때문이다.
3. 이 이론은 우리의 사회생활에 기여한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우리에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업신여지기 않고 비웃지 않으며, 그 누구에 대해서도 성내지 않고 시기하지 않는 자세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 이론은 각자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써 만족해야 하며, 자신의 이웃에 대해서는, 여성적인 동정이나, 편애 또는 미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理性)의 지도에 이하여, 시기(時機)와 사정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원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것에 대해서는 제4부에 밝힐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이 이론은 국가 공동체를 위해서도 적지 않게 이바지 한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시만들을 어떤 방식으로 통치하고 지도할 것인지를, 즉 시민들이 노예처럼 일하지 않고 자유롭게 최선의 것을 행하도록 통치하고 지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 여기 편집한 글은 앞서 <지성이 무명일때>라는 글에서 인용한 정의 49의 주석 일부에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며 그것을 부연설명하는 것임을 염두해 참조 바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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