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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타기성 속에서 我와 法을 이해하는 변계소집성이 다하면 유식실성을 보는데 이때 완벽한 전의 즉 삶의 근거가 전환된 것이다. 변계소집성의 삶을 살아왔는데 우리는 드디어 완벽한 원성실성을 통해서 의타기성으로 사는데 그 의타기성을 사는 것이 활동 그 자체로만 사는 것이다. 이제 무엇이 활동하는게 아니고 하나의 손을 내밀고 하나의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전부가 표현된다. 어떤 경우에 보면 '할'을 하거나 '방'을 하거나 손을 내밀거나 눈썹을 깜빡이는 것이 실재로는 그 사람의 전부인 것이 분명하지만 뒷날보면 그러한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거나 약간의 맛을 보고 그것이 그것인 것처럼 생각해서 부처님이 뭡니까라고 물었을때 주먹을 내민다든가 부처님이 무엇입니까 했을때 '할'을 한다고 했을때 이미 죽은 주먹이나 죽은 '할'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임제스님께서도 돌아가실때 내 법을 통해서 깨달음 있는 사람은 말을 해봐라 하니까 어떤 스님이 '할'을 하죠.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내 법이 당대에 죽었구나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깨달음의 완벽한 표현임에는 분명하지만 논리상으로 이론상으로. 왜냐면 내용에 自我가 있는게 아니고, 정보 그자체가 한생각이 나오면, 이것이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정보가 나오는게 아니고, 이 모든 정보의 총량이 어떤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업 자체가 이때는 업이라고 할 수 있고, 업이라고 하는 말이 그냥 활동이라고 봤을 때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행동양상이 그 자체가 부처의 표현임이 분명하지만 그 내용 가운데서 진실로 미세망념이 다하지 않은 표현으로써의 부처라고 하는 것은 자칫 오히려 그렇게 배워진 학습된 정보를 통해서 부처를 내보이지만 이것은 과거의 학습되어 진 것에 의해서 현재가 지배받고 있는게 된다. 마치 브라만의 가르침 베다 성전에 가르침을 통해서 학습되어진 브라만이 선수행을 통해서 비춰지듯이 할이나 방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임제스님께서도 당대에 내 法이 죽었다라고 말한다. 활동 그자체가 삶의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살아있는 활동이 될 수 있고 죽은 활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도 그것을 잘 살펴서 마음 가운데 아와 법의 상황이 단 한치라도 있는지 없는지 잘 살펴야 된다." 1
- 정화스님 <유식강의> 녹취록에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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