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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정리 9. 정신은 또렷하고 명확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나, 혼란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나, 무한한 시간 동안 자기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하며, 또한 이러한 자기의 코나투스를 의식하고 있다.

 

증명: 정신의 본질은 타당한 관념과 타당하지 못한 관념으로 구성 되어 있다(우리가 정리 3에서 밝힌 것과 같이). 따라서 (정리 7에 의해) 정신은 타당한 관념을 지니고 있는 한에 있어서나 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나 자기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 더욱이 정신은 무한한 시간 동안 (정리 8에 의해) 자기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정신은 (제2부 정리 23에 의해) 신체의 변용의 관념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자기를 의식하므로, 정신은 (정리 7에 의해) 자기의 코나투스를 의식하고 있다.

 

주석: 이 코나투스는 정신에만 관계되어 있을 때는 의지라고 불리지만, 그것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어 있을 때는 충동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충동은 인간의 본질 자체일 뿐이며, 그것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이 나온다.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행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다음으로, 충동과 욕망의 차이라면, 욕망은 보통 자신의 충동을 의식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의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 뿐이다. 따라서 욕망은 충동에 대한 의식을 수반하는 충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은 이러하다. 즉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어떤 것을 지향하고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T1000.0 : 1.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을 코나투스라한다. 코나투스는 필연적인 힘이며 모든 개개의 사물의 본질이다[코나투스를 생명력이라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측면에서(제1부 정의1과 정리 7에 의해) 모든 것은 자기 원인을 속성으로한 신이 표현된 것이고 일체는 실체의 변용인 양태들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게 부처.  

2. 욕망은 충동에 대한 의식을 수반하는 충동으로 인간만의 영역에 존재한다.

3. 코나투스가 필연적으로 존재의 보존에 기여하는 욕구이므로 그것을 의식하는 욕망의 추구가 선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 존재를 온전히[홀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보존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을 자기 자신, 또는 특정인들만의 존재를 보존하는 충동으로 의식하는 욕망은, 존재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을 훼손하는데도 그것의 왜곡을 의심하지 않으면, 선을 도덕으로 위장해 누구를 위한 가치로서 굴림하는 것 같다. 자연을 인간만을 위한 세상으로 만든다거나 사회를 특정인들을 위한 세상으로 만든다거나.

4. 무엇이 선인지는 무엇이 존재를 온전히 보존하는 길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될 것이다. 모든 게 어울려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자연의 존재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선이 추구하는 바이며 이것과 일치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떠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쾌락을 좇는 것이겠지만]은 존재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과 어긋나기에 궁극적으로 행복해질 수가 없다.

4.1. 들뢰즈가 "나는 쾌락에 어떤 긍정적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쾌락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쾌락은 지층들과 조직의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욕망이 내부적으로는 법칙에 복종적이고 외부로부터 단절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쾌락에 의해 야기되는 동일한 움직임 안에서이다. 이 두가지 경우 모두에서 욕망에 고유한 내재성의 장은 부정된다.[각주:1]"라고 했을때 이 말인즉 쾌락은 욕망에 고유한 내재성의 장, 이를테면 존재를 보존하려는 코나투스의 흐름을 중단시킨다. 존재를 보존하는 흐름을 중단시키는 쾌락이 지층들과 조직의 편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때 쾌락이 궁긍적으로 행복이 될 수 없는지 분명해진다. 

4.1.1. 쾌락을 추구한다고 존재의 보존이 단번에 끊어지진 않는다. 그러나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이 반복될때 그 과정 자체가 존재를 보존하는 연결점들이 끊어져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이 되고 만다는 점에서 쾌락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건강의 지속과 보존을 생각한다면 담배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할 수 없는게 아닌가.  

 

 

  1. <탈주의 공간을 위해서> '욕망과 쾌락' p1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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