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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앎

프란시스 베이컨, 메모 3-1

T1000.0 2021. 1. 20. 20:19

1.
글쎄요. 나는 늘 똑같은 종류의 것들을 읽는 편이지요. 같은 책을 여러 번 다시 읽습니다.
(162)

2.
번역자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나는 셰익스피어를 번역본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164)

3.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나의 의견을 묻는다면, 베케트와 조이스가 말하려고 했던 바를 셰익스피어가 좀더 시적으로, 더 정확하게 그리고 훨씬 더 강력한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나는 언제나 깨닫곤 합니다. 최소한의 수단으로 최대한의 것을 표현하는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매우 우수하며 제법 신뢰할 수 있는 본능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매우 창조적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셰익스피어조차도 항상 그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지요. 그의 작품에는 끔찍하게 지루한 부분들이 약간 있지요.(169)

"인생이란 한 낱 걷고 있는 그림자, 가련한 배우.
제 시간엔 무대 위에서 활개치고 안달하지만
얼마 안 가서 영영 잊혀져 버리지 않는가.
글쎄 천치가 떠드는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고래고래 소리를 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멕베드 5/5

"꺼져라, 꺼져, 덧없는 촛불아!
인생은 한낱 걸어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
제 시간이 되면 무대 뒤에서 뽐내며 시끄럽게 떠들지만
어느덧 사라져 더는 들리지 않는구나
그것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소음과 광기로 가득차 있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구나"

4.
나는 베케트가 불필요한 것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이 생략함으로써 많은 것을 말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접근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평소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는 늘 너무 많은 것을 그 속에 남기고 결코 충분히 잘라내는 법이 없지요. 그러나 나는 베케트의 작품에서 종종 그가 자신의 텍스트를 숫돌로 갈듯이 말끔하게 다듬으려 했기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작품은 울림이 없고 완벽한 공허만 남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는 복잡한 개념들을 단순하게 만들려고 했지요. 그 생각은 훌륭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경우에 나는 그 지적인 두뇌가 나머지 것들에 너무 밀려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 쇠라에 대한 나의 인상과 거의 일치합니다. 예술에 대한 베케트의 생각들이 결국 그의 창조력을 죽인 게 아닌지, 동시에 그에겐 지나치게 체계적이고 지나치게 지적인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아마도 나를 늘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170)

5.
그렇다면 당신에게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은 여전히 셰익스피어입니까?

네. 아마도 영어가 나의 모국어이기 때문이겠지요. 부족한 어휘에도 불구하고 내가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읽기 좋아할지라도 말입니다. 나는 항상 셰익스피어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지요. [나는 항상 반야심경과 금강경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지요.] 그는 참으로 특별한 대사들을 썼지요. 멕베스의 저 위대한 마지막 연설을 생각해보십시오. 죽음과 삶의 덧없음에 관한, 지나가버리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간에 관한 그 유명한 대사들을. 그같은 문구는 정말 독특합니다. 그리고 그처럼 인상적인 문구들이 다른 데서도 많이 나오지요.(171)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t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 fall of sound and furry signifying nothing
-(Macbeth 5/5)


6.
나는 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즐겨 읽지요. 그는 나를 자극하여 나로 하여금 가장 훌륭한 작품들 몇 개를 생산하게 만들었던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173)

7.
아니오. 특별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그[블레이크]의 시가 그의 그림이나 혹은 내가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 드로잉보다 낫다는 것을 때닫게 됩니다.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갖고 있는 회화적 형태입니다. 나는 그의 시와 마찬가지로 그의 그림과 드로잉에 존재하는 이러한 신비적 측면을 혐오합니다. 당신도 이미 아시겠지만, 나는 종교에서 너무 근접한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174)

8.
이 그림들에 영감을 준 것은 오히려 이미지 그 자체였지요. 글보다는 이미지들이 더 자주 내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거나 꽉 막힌 창조력을 풀어준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요. 이 모형 또한 사진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나의 작업을 도와줄 수 있을 때 내게 주어졌지요. (175)

9.
그가 번역을 기막히게 잘했으므로, 원래의 대화보다 더 훌륭했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엄청 운이 좋았던 셈입니다. 그는 모든 감각과 본능을 동원해 번역을 했고, 그래서 내가 표현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부여했지요.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번역한 것을 내가 읽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이 실제보다 훨씬 더 지적이라고 느꼈지요. 내가 그같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요. 그가 위대한 작가이기 때문이지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작가일 때, 진정한 작가 일 때, 그럴 경우에만 비로소 번역이란 것이 아마도 가능할 것입니다. (176)

10.
나는 미셀 레리스를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는 멋진 친구이고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치 영감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는 회화에 관한 일종의 육감과도 같은 진정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요. 그는 피카소를 굉장히 예찬했지요. 언젠가 그가 내게 말했지요. "내게 피카소는 하나의 등불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피카소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밝혀주었지요. 나는 그처럼 열광하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내가 이미 말했듯이,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피카소에게서 많이 발견되니까요. (193)

[베이컨은 피카소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그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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