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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앎

프란시스 베이컨, 메모 3-4

T1000.0 2021. 1. 22. 06:52

30.
글쎄요. 나는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부모님들이 그토록 여러번 이사 다니는 바람에.... 나는 훗날 내 스스로를 가르쳤지요. 사람들이 내게 추천하는 책이나, 혹은 스스로 발견한 책들을 읽었지요.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해서 나는 교육받은 겁니다. 학습과 학교는 내게 없었지요.

그리고 그림에 대해선 어땠나요?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나요?

아니오. 나는 가르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은 보면서 배우지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겁니다. 보세요. (214)

31.
그러나 많은 화가들이, 나는 지금 특히 세잔, 마티스 그리고 다른 화가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단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아직 젊은 화가였을 때, 그들은 옛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지요. 프랑스인들은 루브로에 가곤 했지요. 당신은 그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유혹을 받은 적이 없나요?

아니오, 없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가르쳐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한 번도 그럴 필요를 느낀 적이 없지요. 불행하게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재능을 자기 것으로 취할 수는 없다고 나는 항상 믿어왔지요. 물론 나 역시 과거의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들에 글자 그대로 사로잡힌 적은 있지요. (215)

32.
예를 들어, 당신은 지금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를 생각하고 계신가요?

네.

하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고, 그리고 그건 복사라기보다 차라리 그 유명한 초상화에 대한 당신 나름의 해석에 가까웠지요.?

네, 어쩌면 나는 결국 그것을 단순히 복사하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것을 재창조하려고 애썼습니다만, 그게 성공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캔버스들이 당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라는 데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나요?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겠지요. 그러나 내겐 그렇지 못합니다. 내가 정말로 그 그림들을 그렸다는 걸 나는 하나의 실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작품에, 내가 본 그 복제품들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그건 매우 독특한 초상화라서 나는 그것에 바탕을 둔 무언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에 관해선 이미 당신에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난 그것에 완전히 압도당했고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느껴 그렇게 했지요. 나는 그 이미지에 완전히 넋을 빼앗겼지요. 불행하게도 결과는 만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217)

33.
당신은 늘 고독을 향한 이러한 욕구를 갖고 있나요. 당신은 그것을 추구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홀로 지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상황에 달려 있지요. 작업하고 있을 때, 난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내 작업실의 총인종이 울리지 않는 이유이지요. 누군가 벨을 누를지도 모르지만 , 나는 듣지 않습니다. 일하는 동안에는 방해받지 않는 것이 내겐 확실히 훨씬 좋습니다. 내가 허락할지도 모르는 아마도 유일한 예외는 심각한 연애에 빠졌을 때일 겁니다. 하지만 그건 물론 아주 드문 경우이고, 특히 나이가 들어서는 더 그렇지요. (218)

34.
나는 아침에 일하기를 좋아합니다. 보통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약 여섯시경이지요. 그래서 열한시나 혹은 정오까지 일을 합니다. 그리고 나선 점심을 먹은 뒤에 잠시 휴식을 취하지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선술집에 가기도 하는데, 대개의 경우 혼자 간다는 걸 고백해야겠군요. 때때로 친구들이나 나를 보러 온 사람들과 함께 가기도 합니다. 나는 또한 그곳에서 나처럼 무얼 마시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온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친구가 아니고 단지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들일 뿐이지요. 대체로 그것은 사랑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을 만나지요. 그리고 당신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점점 더 줄어들지요. (219)

35.
당신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나요?

오, 아닙니다. 나는 오직 여기 내 작업실에서만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 동안 거처를 여러 번 옮겼지만 최근 약 삼십년 동안 이곳에 살고 있지요. 그래서 이곳은 내게 무척 잘 맞습니다. 나는 너무 깨끗한 곳에서는 작업을 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어질러진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내겐 더 쉽습니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지만, 그게 도움이 됩니다. 나의 작품에 대해서도 똑같은 생각이 들지요. 작업을 시작할 때 나는 어떤 아이디어들을 갖고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내가 가진 유일한 아이디어는무언가를 한다는 것뿐입니다. 내 머리 속에서 제대로 정돈된 거라곤 아무것도 없지요. 나는 어떤 종류의 자극에, 어떤 조짐에 반응하고, 그리고 그게 전부입니다. 만일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나중에 그것이 캔버스 위에 나타나지요. 불행하게도 그 결과가 최초의 흥분에 못 미치는 경우가 왕왕 있지요. 내가 결과에 만족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를 둘러싼 이러한 어수선함은 내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거죠. 내 인생은 그와 같지요.(223)

36.
나는 종종 세 폭 그림에 관한 질문들을 받아왔지요. 진실을 말하자면, 정말 나도 모르겠습니다. 내 경우에 사람들이 세 폭 그림이라고 이야기할 만한 게 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물론 세 개의 캔버스가 있고, 그래서 당신은 그것을 오래된 전통에 결부시킬 수도 있습니다. 원시주의자들은 종종 세 폭 제단화 형식을 사용했지요.. 그러나 내 작품에 관한 한, 세 폭 그림은 차라리 필름 위에 연속적으로 나타는 이미지들의 개념에 더 가깝지요. 흔히 세 개의 캔버스가 있지만, 내가 계속해서 그 수를 더 늘리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왜 거기에 세 개 이상의 캔버스가 있으면 안되는가? 내가 아는 건 단지 이 캔버스들이 서로 분리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구겐하임 미술관이 <십자가의 못박힘>의 화판 세 개를 하나의 액자에 끼워 놓은 걸 보고 그토록 분개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지요. 나는 그것들이 분리되기를 원하고, 그리고 이건 다른 세 폭 그림의 캔버스들에도 해당되는 얘기 입니다.

보기에 따라서 그것들은 연속물인가요?

네. 어떤 의미로는 그렇지요. 하나의 이미지, 또 하나의 이미지, 그리고 이미지들의 연속에 어떤 리듬을 부여하는 틀 안에서 또 다른 하나.(226)

37.
네. 나는 늘 캔버스들이 액자 속에, 유리 안에 넣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림들을 틀에 끼우지 않는 게 요즘 유행이지만, 그림이 무엇인가를 명심한다면 이건 어쩐지 잘못된 일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액자는 인공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거기에 존재하는 거지요. 즉 그림의 인공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림의 인위적인 성격이 분명해질수록 더 좋으며, 그 그림이 성공하거나 혹은 무언가를 보여줄 기회가 그만큼 더 많아지는 겁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술에서는 완벽하게 뜻이 통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인위적인 수단을 써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고, 인공성이 명백히 두드러질 때 무언가 진정한 일을 하는 데 더 성공하지요. 그리스나 고전 고대의 시인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들의 언어는 매우 인공적이고 고도로 양식하되어 있지요. 그들 모두가 엄격한 긴장 속에서 작업을 했고, 그리고 분명히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읽을 때 우리에게 자유롭고 자발적인 인상을 주는 가장 위대한 작품들을 생산했지요. (228)

38.
네, 그건 내게 여행을 할 좋은 구실을 제공할 겁니다. 당신은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모를 겁니다만, 내가 아는 나라들 가운데 프랑스를 나는 제일 좋아합니다. 나는 몬테카를로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고, 그리고 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곳에 나의 작업실이 있을때, 단지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항상 외출했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작업을 하지 못했지요. 이곳 런던에서는 정말로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파리보다 런던을 더 잘 안다고 말해야만겠군요. 그래서 작업에 관한한, 나는 유혹을 덜 받지요. 나는 전시회를 보거나 그냥 한가로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위해 정기적으로 파리에 갑니다. 또한 내가 그것에 머물 때마다 미셀 레리스를 만나러 가곤 했지요.

파리는 최근에 많이 변했지요. 당신은 아직도 파리를 예전처럼 좋아하나요?

네. 정말 아름다운 도시지요. 팔레로얄에 세워진 열주들이 그다지 성공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새로운 산책 길이 있는 그랑 루브르와 그 반대쪽 끝에 위치한 라데팡스의 아치를 나는 좋아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들은 파리의 구획배치를 따른 거지요. (229)

39.
얼마 전에 뉴욕에서 당신 작품의 거대한 회고전이 열렸지요. 왜 당신은 거기에 가지 않았나요?

글쎄, 그건 당신이 그 당시에 그 행사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에 날려 있지요. 또한 당신 눈앞에 걸려 있는 당신 자신의 작품이 당신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안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러한 종류의 행사들에 대한 나의 기억은 다양하고, 그리고 때때로 나는 내가 해놓은 작업들이 다소 범속하며 그밖의 어떤 것들보다 더 형편없다는 걸 발견합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항상 내 전시회를 보러 가고 싶어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그건 또한 내가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작품을 보기 위하여 당신은 어떤 감정 상태에 있어야만 하며, 당신이 처한 상태에 따라 당신의 지각도 변화하지요. (231)

40.
그래서 간단히 말하면, 모든 지각은 상대적이다?

네, 그림을 볼 때는 늘 그렇지요. 그러나 물론 모든 사람은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을 번역하지요. 앵그르의 초상화들이 내게 주는 인상은 그밖의 누군가에게 주는 인상과는 사뭇 다르지요. 그리고 그건 단순히 내가 화가이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니지요. 당시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떤 사람의 얼굴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지요. 당신은 어떤 인상을 받고 그래서 당신은 그러한 인상에 기초하여 온갖 종류의 분석을 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얼굴을 본 다른 누군가는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지요. 이와 똑같은 현상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인 오렌지 색에도 적용됩니다. 왜 내가 그것을 그토록 아름다운 색채로 생각하는지를 나는 어떤 식으로든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232)

41.
지금 당신의 말은 모든 비평을 어려움이 따르는, 그리고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셈입니다.

네, 그러나 어쨌든 회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변명처럼 보였고 그리고 지금은 어쩌면 그 이상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림은 그 자체로 자기 만족적인 하나의 세계입니다. 회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개의 경우 우리는 흥미로운 것은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피상적이었지요.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어요? 기본적으로 나는 당신이 그림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건 불가능할 따름입니다. (232)

43.
하지만 당신은 그럭저럭 그것을 매우 잘 해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단지 우리의 대화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내가 수다스럽기 때문이지요. 내 속에 있는 아일랜드적인 기질 탓이지요.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요. 화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밖에 없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그림을 그린다?

네. 설령 그것들이 단순한 복사품일지라도,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만 합니다.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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