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삼신불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대원력의 자비행입니다. 이러한 중생을 보살이라고 부르며 보현보살이 그 대표입니다. 그러나 보현 보살이라고 해서 낱낱 중생을 떠나서 저머리 훌륭한 모습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실천하고 있는중생의 활동이 보현 보살의 모습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지혜덕상이 언제 어디서나 자비로움으로 나투는 화신 부처님의 행동이 보살의 원력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기 바로 앞의 모습으로 중생세간에 있겠다고 원력을 세운 분을 보살이라고 하여 부처님과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보살의 모습이 곧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 열반의 세계인데 보살은 이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기형도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가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이와 같음을 내가 들었사오니, 한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성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2. 아니오. 나는 가르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은 보면서 배우지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겁니다. 보세요. (화가의 잔인한 손 214)
경청은 가만히 듣는다. 모든 분별을 내려놓는다. 사랑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다.
어떤 태도나 어떠한 윤리적 실천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선택하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의식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일종의 결정이전의 것(결정 이전에 미리 결정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전을 떨어뜨린 할머니를 보면 아무런 생각 없이 허리 숙여 동전을 주워서 할머니에게 돌려줍니다. 이렇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태도입니다. 만약 젊은 사람이 돈을 떨어뜨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때도 허리 숙여 동전을 줍습니까? 그 젊은이가 스스로 허리 숙여 동전을 주울 힘이 있는데도요? 그를 도우면 우스운 사람이 됩니까? 저는 이에 대해서 이것은 태도의 문제라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미리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누가 동..
청정한 마음을 내라. 분별 없는 마음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냄새나는 대로, 맛보는 대로, 만져지는 대로, 느끼는 대로의 이런저런 신념을 기꺼이 버릴 자발적인 마음을.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 청정한 마음은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다. 다만 그 이름이 청정한 마음이다. 1. 이렇게 두 시간 동안 비판을 했는데, 그 분께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다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여보게. 어떤 사람이 말이야. 논두렁 밑에 떡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네. 그곳이 절이야. 그것이 불교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