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수한 독일인들이 전후에, 나치 시절의 공포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그들 모두가 거짓말쟁이는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그들 중 일부는 단순히 끔찍한 진실에 대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 내면에서, 그리고 그들의 영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떤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도록 만드는 독재체제 하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틀림없이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을 텐데 어느 정도로 불가피하게 맹목적으로 되어 가는가? 맹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목적의 되어 가는 것인가? 도대체 맹목성 어떻게, 그리고 어떤 식으로 생산되는가?' 무엇을 관찰하게 되었나요? 어디에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통행금지를 공표한다면 그..
만일 당신의 평가가 옳다면, 그렇다면 나는 내 생각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속임수를 쓰면서 그러한 시도들을 할 때 나의 작업은 보다 인간적인 형태의 삶을 창조하는 데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들을 위해, 개인들의 치부를 위해 착취되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의 지배 우상들, 능률 지향, 광인 통제, 그리고 성공에의 열망을 섬기기 위해 착취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능한 한 많은 인간들의 복리를 위해 나의 작업을 이용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이러한 발전들을 받아들이고 또 인간 본성에 대한 나의 믿음을 유지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내 생각의 남용을 막으려고 시도했다면, 나는 불가피하게 폭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추울땐 추위가 되고 더울땐 더위가 되라
마뚜라나 맞습니다. 지시명령적 상호작용이라는 잘못된 개념은 다음과 같은 대안적인 생각에 의해 바로잡혀야 합니다. '살아 있는 존재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그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외적 작용체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논평하는 관찰자의 시각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속해 있는 섭동들(perturpations)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관찰자는, 그가 보기에, 체계에 충격을 가하고 그 안에서 (구조의 파괴에는 이르지 않고 그것의 조직을 유지하도록 허용하는) 구조적 변화들을 유발하는 어떤 실체(entity)를 지각합니다. 이 마주침의 형태를 나는 섭동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 체계가 자신의 정체성[동일성]을 잃고 붕괴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파괴적인 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