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 깜빡했네요. 내 인생이 끝났다는 걸... "어떤 생각을 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웠다"는 것을 흔히들 스트레스를 푼다, 힐링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힐링 받기를 원하지만 다시또 되풀이되는 스트레스와 힐링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위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스트레스는 생각이란 점이다. 따라서 생각을 바꾸면 스트레스는 없다. 사라진다. 스트레스, 괴로움이 어떤 사실이 아니라 생각임을 분명히 성찰하면 괴로울 일도, 따로 스트레스를 풀 일도 없다. 그냥 사는 게 흥미진진 할 뿐. 스트레스는 받는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내가 만드는 것임을, 생각임을 바로 안다면 나는 스트레스를 받을지/안받을지를 능동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기로 결정하는 건 ..
어떤 음식이 싱겁다고 느낄 때, 그 음식이 나에게 싱거운 거지, 그 음식 자체가 싱거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음식이 객관적으로 싱겁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실과 다르며 나아가 그 생각을 고집해 행동한다면 부작용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망상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꼴이니. 허나 내 입 맛에는 싱겁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그에 따른 행동에 아무 부작용이 없다. 현상은 내 입맛에 싱겁다와 음식은 음식일 뿐이다가 서로 일치[색즉시공]하면서 인연과보의 작용이 존재한다. 앞서 보았듯이 전자는 어리석음으로 인한 부작용을 후자는 바른 이해를 통한 부작용 없는, 작용들처럼.
그런데 책상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책상이라는 사물이 눈앞에 없더라도 같은 이미지가 항상 떠오릅니다. 이는 책상에 대한 인상을 고정시켜서 말[名]로 표현한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물을 그와 같이 보는 힘, 곧 종자가 책상이라는 영상을 동일불변의 실체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상의 실제는 만남의 조건에 따른 변화이지만, 말[名]의 영상은 늘 일정하게 됩니다. 책상의 변화가 언어로서의 고정된 이미지인 책상이라는 틀에 의해서 얽매이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책상이라는 말이 책상으로부터 파생된 것 같지만, 책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책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언종자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는 전혀 다른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생각이 현실을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 곧 연기를 떠난 곳에서의 아와 법이란 실재하지 않은 것이며, 관계의 장에서의 아와 법은 이름과 같이 나뉠 수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나뉠 수 없는 관계, 곧 연기가 나뉨으로 이해 아와 법이 제 성품을 잃고 서로가 소외되어 있는 인식의 장면들은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假]으로 밖에 이야기할 수 없으며, '나'와 대상이 서로 나뉘어 소외되면서 스스로를 얽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눈만 뜨면, 생각만 열리면, 심지어 생각이 열리지 않을 때에도 주관과 객관의 고정화로 인한 갈등과 불만족은 계속 됩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나 눈을 감고 있을 때나 잠을 잘 때조차도, 주관과 객관을 이원화시켜서 삶의 청정성을 왜곡시키는 힘이 작용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총체적인 인식의 장으로 보지 못하고, 분별된 ..
그런 말[목적인]을 듣고, 화 안나게 생겼어? 1) 목적인이라는 환상: 의식은 결과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물들의 질서를 전도시킴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메운다. 의식은, 한 신체가 우리 신체에 미친 결과를 외부 신체의 작용의 목적인으로 만든다. 화가 나니[제1원인], '내가' 널 미워하는 거야. 2) 자유명령이라는 환상: 이제 의식은 자신을 제1원인으로 간주하게 되고, 신체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내세운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거야. 당연해. 3) 신학적 환영: 의식이 자신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제1원인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의식은, 지성과 의지를 갖고 있는 신, 목적인과 자유 명령에 의해 행위하며, 영예와 처벌에 따르는 세계를 인간에게 마련해 놓은 신을 내세운다. 의식은 환상들로 형성된다고..
* 공기계연구노트 에서 이 부분을 이미 언급함(2012.12.13)을 뒤늦게 발견^^ 그때의 명쾌한 코멘트를 읽고 스스로 놀람. "T1000.0 : 판단의 기준이 자신의 감정에 기초해 있다는 것은 기준이 객관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단지 다양한 차이들이 있을 뿐. 따라서 마땅하다 마땅치않다는 판단은 그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원인과 조건, 인연에 따라, 시간과 공간과 인과가 조화와 균형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며 원인과 조건이 바뀌면 당연히 기준은 바뀐다. 잊지말아야할 것은 지금 나의 판단이란 것이 알게모르게 맺어온 인연의 결과물이지 자유로운 판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문에 내 생각이 옳다고 할 객관적인 근거는 ..
내가 원하는 바가 나의 자유의지가 아니며, 따라서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자유가 이뤄지는 것으로 여기는 바는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바, 즉 내가 의식하는 욕망을 결정한 원인들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지은 바 인연을, 몰라 내가 나의 자의로 욕망한다고 생각하고 행동의 제1원인으로 착각하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상 또는 무지] 프로세스를 새겨 두 눈 뜨고 꾸는 꿈에서 항상 깨어 있기가 첫째로 필요하고 동시에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을, 내가 지은 인연의 결과[또는 총체]로서 바라보면 나에 대한 이해와 제어 방법을 터득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컨트롤하는 나의 주인으로 산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자유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 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