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관찰자라는 개념이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인 체험을 하는 가운데 여러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우리가 지각하고 다루는 그 사물들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히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외부의 관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관찰자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그것이 마치 자신들과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구분하는 인간들이다.' 그래서 이제 이 체험이 설명되어야만 합니다. (함으로 47) T. 관찰자라는 개념은 "마치 자신들과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구분"한다. 말을 바꿔 관찰자의 구분인, 분별..
1. 주체와 대상의 구분은 모두 언어에 의존해 있다. 뒤집어 말하면 언어[이름 붙이기]를 통해 주체와 대상이 출현한다. 2. 나는 언어에 의존해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언어와 연기되어 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며 언어와 더불어 존재한다. 언어 없이는 나를 산출할 수 없다. 3. 나는 언어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언어로 말미암아 나는 언어와 구분되어진다. 나는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4.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과정을 성찰하는데 역시 언어의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언어를 사용하면서 언어를 성찰한다. 언어의 구분을 통해 주체와 대상이 구분된다는 것을 언어로 말미암아 '안다'. 우리가 인식하는 과정을 인식함으로서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앎인, 무지를 깨달을 수 있다...
어떤 체험을 환각으로 분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필요합니다. 즉 이 체험은 그것이 체험될 때 그와 동시에 환각적인 것으로 체험되지 않는 어떤 것과 관련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출발점은 나의 체험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그 모든 것을 어떤 시점에서 지각 가능한 사건들로 경험하고 구분한다는 것이다.' 나는 존재나 외부 실재의 속성들과 관계가 없을 뿐더러 유아론이나 그 밖의 다른 종류의 인식론을 방어하는 것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우리의 체험들을 낳고 형성하는 작동들을 이해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작동들을 설명하는 바로 그 행동 속에서 명확해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서술하는 대상들과 실체들..
우리는 우리가 본다는 것을 본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 나, 인식작용, 앎자, 관찰자. 무아(색수상행식의 순환/흐름) 1. 선생님이 얘기하고 있는 것이 가져오는 직접적인 결과는, 외부 세계와 인식하는 주체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상황은 빙글빙글 순환하며 도는 군요. 이것이 결정적인 점입니다. 내 연구의 대상, 그와 동시에, 불가피하게, 내 연구의 수단은 관찰자입니다. 실로 우리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나누는 전통적인 분리를 대체하는 순환적인 상황 속에 얽혀 있습니다. 나는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나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아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를 내 사고의 출발점으로서 이용합니..
그렇지만 관찰자라는 선생님의 핵심 개념은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요? 통상적인 어법에 의하면 그 말은 -관찰하다, 거리를 유지한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중립성을 주장한다'라는 - 어떤 분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관찰자라는 말을 자신들의 세계와 분리되지 않고 묶여있는 참여자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이 좋지 않을 까요? 나는 관찰자라는 개념이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인 체험을 하는 가운데 여러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우리가 지각하고 다루는 그 사물들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히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외부의 관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다음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