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와 법은 관계속에서만 아 또는 법으로 제 모습을 나투고 있으며, 관계의 장이 아닌 곳에서는 아와 법을 세울 수 없습니다. 관계의 장을 떠난 아와 법은 단지 습관적인 인식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그와 같이 인식하게 하는 원인, 곧 습관적인 인식을 낳게 하는 인식의 종자에 의한 것입니다. 관계, 곧 연기를 떠난 곳에서의 아와 법이란 실재하지 않은 것이며, 관계의 장에서의 아와 법은 이름과 같이 나뉠 수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2. 나뉠 수 없는 관계, 곧 연기가 나뉨으로 인해 아와 법이 제 성품을 잃고 서로가 소외되어 있는 인식의 장면들은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으로 밖에 이야기할 수 없으며, '나'와 대상이 서로 나뉘어 소외되면서 스스로를 얽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눈만 뜨면, 생각만 열리면,..
욕구에 기초한 자유와 욕구로부터의 자유. 선택은 자유다. 내 생각에,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어떤 선택이든 좋다. 단 욕구에 기초한 자유는 [자유가 중단되지 않으려면] 절제를 필요로 한다. 욕망[하는 생산]은 끝이 없다. 욕구로부터의 자유는 당연히 절제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금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욕구로부터의 자유는 욕구하지 않는 게 아니고 욕구에 집착하지 않는다. 돈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 지위가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지위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 데는 집착을 참거나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얻을 바가 없음을 바로 알기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때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사람을 뺏고 경계를 뺏지 않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스님이 대답했다. "햇빛이 따스한 봄날에 만물이 발생하여 대지에는 비단을 깐 것 같고, 어린아이가 머리카락을 내려 뜨리니 하얀 실과 같다." 스님이 질문했다. "경계를 빼앗아 버리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스님이 말했다. "왕의 명령이 이미 천하에 두루 행하여지는 태평의 시절에는 전방 요새에 있는 장군도 전쟁을 하지 않아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는다." 스님이 질문했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스님이 말했다. "병주幷州와 분주汾州의 신의를 끊고 지금은 독립하여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스님이 질문했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
임제스님은 곧 이어서 말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체득한 경지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만일 이렇게 오는 사람은 내 앞에서는 마치 그의 본래심을 잃어버린 것과 같고, 이렇게 오지 않더라도 노끈 없이 스스로를 얽어매고 있다. 항상 언제라도 쓸데없이 짐작하고 분별하지 말라.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도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나의 설법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의 비판에 맡기도록 하겠다. 오래 서서 법문을 듣느라 수고들 했네." (임제어록 52)
임제스님이 곧 이어서 말했다. "여러분! 대개 불법을 체득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사람은 몸을 상실하고 목숨을 잃는 어려움을 피하지 말라. 내가 이십 년 전에 황벽선사의 처소에 있을 때, 세 번이나 불볍의 올바른 큰 뜻을 질문했다가 세 번이나 황벽선사의 주장자를 얻어 맞았는데, 그것은 마치 쑥다발로 등을 쓰다듬는 것과 같았다. 지금 다시 옛날처럼 황벽선사로부터 한 방망이를 맞고 싶은데, 누군가 황벽스님을 대신해서 나를 때려 줄 사람이 있는가?" 그때 어떤 스님이 대중 가운데서 나와 말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임제스님이 방망이를 그 스님에게 건제 주려고 하였다. 그 스님이 방망이르 건제 받으려 하자마자 임제스님이 곱바로 그 스님을 때렸다. (임제어록 46) T. 임제스님의 즉문즉설, 할! 방!
물이면서 얼음이며 얼음이면서 물인 접면이 물과 얼음을 있게 하고, 그 접면을 공에 견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접면이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사실은 이 접면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곧 공이 모두의 진실한 모습이며 공이기 때문에 생명활동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공이 일어나서 한 모습을 나투는 것을 잠깐 존재하는 가법假法이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모습은 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인 접면의 인연에 따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과 가법이 중도인 까닭이 있습니다. 접면은 그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고서도 그 어느 것에도 존재하고 이것을 따라서만이 몯느 법이 제 모습을 나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도인 공은 하나의 사건이나 사물들이 이루는 접면인 동시에 그 낱낱..
에 보면 "비가 금이 되어 내려도 끝나지 않을 갈증, 자꾸만 되살아나는 욕망"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또한 "구도자여!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때까지 어는 것에도 기대지 마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법성게 196) 이때 그렇게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던 찬란한 무지개가 성큼 자기 앞에 공존하게 됩니다. 잡으려고 하는 만큼 멀어지던 것이 그저 지켜보는 것으로 있을 때 함께 살아 있습니다. 현실은 가지려는 자에 따라서 비틀어지기도 하지만 지켜보는 자에게는 빛으로 존재합니다. 지켜봄이란 삶조차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삶을 놓을 때 삶이 삶답게 살아나면서 현실에 만족하게 되고 집착은 사라집니다. 개인과 국가가 그 소유를 키우려고 하는 현실, 소유가 많은 만큼 잘 산다는 비틂 앞에 "끄달리지 말라"는 가르침이 무..